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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헌 May 08. 2016

형, 이것밖에 못 뛰어?

③ 벤과의 러닝

"벅은 진동하듯이 앞으로 몸을 힘껏 당겨 끈을 팽팽하게 유지하면서 나아갔다. 그의 몸 전체가 혼신의 힘을 쏟으면서 한 덩어리로 단단히 뭉친 가운데, 윤기 나는 털 아래 근육들이 살아 있는 물체들처럼 불끈불끈 솟구치고 꿈틀거렸다. 커다란 가슴이 땅에 거의 닿은 채 벅은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다리를 미친듯이 움직여 단단히 다져진 눈 위에 나란히 발톱 자국을 냈다." /잭 런던 '야성의 부름' 108쪽


"트라우트(Trout)가 생후 2년이 되자, 성견이 됐다. 그때부터 녀석은 우리 부부와 성실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달린다. 주로 산책과 트레킹을 하는 집 근처 산길에서 뛴다. 트라우트의 다리는 길고 튼튼하며, 몸통은 날렵하다. 복부는 아치형. 뛰는 자세는 힘차고 가볍다. 조킹 코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트라우트를 두고 경주견 '휘핏'이냐고 묻곤 한다." /Sara Corbett 'Running With Trout' Runner's World, January, 2005   


벤도, 나도 러너였다. 주 1회 꼬박 동네를 뛰었다. 강릉 남대천, 오대산 소금강, 용인~분당 탄천… 지난 10여 년 간 함께 뛴 조깅코스만 해도 십여 곳. 거리는 수백 km는 될 것 같다.


벤은 어려서부터 뛰길 좋아했다. 게다가 잘 뛰었다. 저 멀리서 타다다다다다다닥 요란하게 발톱 소리를 내며 달려와, 품에 쏙 안기곤 했다. 네 다리가 안 보일 정도로 재빨리 뛰어와 슝 하고 도약, 그리고 착지. 가족들은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었으면 분명 마라토너가 됐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엄마 아빠가 드라마에 빠져 있을 시간, 나와 벤은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준비물은 목줄이 다였다. 발을 씻기는 게 귀찮아서 애견 운동화도 신겨 봤지만, 채 두 번을 못 신고 물어 뜯었다.


용인에 살 때 우리는 가장 많이 뛰었다. 녀석은 오르막 내리막 경사가 제법 있는 1.2km 단지 한 바퀴를 쉬지 않고 뛰었다. 벤이 한창 때인 7~8살 무렵엔 내가 뒤쫓아 가느라 바빴다. '형, 이것밖에 못 뛰어?'하는 눈초리로 힐끔거리며 쏜살같이 달렸다.


힘이 셌다. 목줄이 팽팽해지도록 치고 나갈 때면 80kg에 달하는 내가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벤이 가장 무거웠을 때가 4kg 남짓. 힘 하나는 머리 하나가 더 큰 슈나우저 급이었다.


담도 셌다. 천성이 시비 걸기를 좋아해, 다리 네 개 달린 동물만 보면 짖어댔다. 한 번은 맞은 편에서 뛰어오던 너다섯 배 큰 사냥개에게 달려들어 혼쭐이 날 뻔 한 적도 있다.


가을과 겨울엔 조깅 후 꼭 목욕을 시켰다. 낙엽과 눈덩이가 복부에 뒤엉켜 잿빛 강아지가 됐다. 달리기와 목욕, 드라이까지 한 시간 넘는 둘 만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녀석은 평소 없던 애교도 부렸다. 그 짓이 보고싶어 조깅에 목욕에, 그 수고(?)를 자처했다.


13살이었던 2012년 이후 벤은 '장거리'를 힘들어 했다. 늘 앞서던 녀석이 뒤처지더니, 뛰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급기야 차도를 건너 집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녀석의 '줄행랑'을 두어 번 보고선 다시 뛰지 않았다. 2013년 전후 허리가 굽고는 30m 뛰는 것도 힘들어 했다.


녀석은 갔지만, 두 손 가득 전해지던 가슴 박동의 느낌은 남았다. 달리기를 마치면 혀를 쭉 빼고 헉헉 대던 녀석을 안아줬다. 쿵쾅거리던 자그마한 심장에 손을 대며, 녀석과 묘한 교감을 나눴다. 벤은 훌륭한 러너였다.    


p.s. 뛰는 게 싫었나. 벤이 꿈에 나와 날 앙 하고 물었다.


Sara Corbett가 Trout와 2005년 뛰던 모습 /Runner's World
매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에서 열리는 'STATE STREET MILE'S DOG MILE' /Runner's World




벤과의 5600일 - 프롤로그

이야기를 시작하며


벤과의 5600일① 대낮의 실종

8월 땡볕, 가출, 도깨비풀


벤과의 5600일② 녀석의 간식들

천하장사 소시지


0일② 녀석의 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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