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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헌 May 23. 2016

탈모여도 괜찮아

④ 털 손질

방콕 수쿰빗의 호텔 객실에 도착하자마자 TV를 켰다. 알아들을 수 없는 태국어 방송이 즐비한 가운데, 한 채널에서 멈췄다. 애견 콘테스트 BBC 라이브.


금발 테리어가 풀밭을 가로지른다. 총총총총. 그레이하운드, 콜리, 세인트버나드가 차례로 장애물 넘기, 민첩성, 걸음걸이, 플라이볼 테스트를 치른다. 열이면 열 고운 자태를 뽐내는 녀석들. 도그쇼도 볼거리지만, 뭐 이런 걸 다 라이브로 중계하나 싶었다. 2014년 9월 여행 첫 날의 기억.


매년 이맘 때 후텁지근한 날씨가 시작될 무렵, 벤은 미용을 했다. 미용이래봤자, 털을 미는 정도였다. '반삭'이 아닌 '완삭'. 박박 밀었다. 태국 TV에 나오던 애견 만큼 호화롭진 않았지만, 미끈한 벤은 정말 이뻤다.


겨우내 지나면서 수북해진 털을 호주 양털 깎듯 홀랑. 벤은 변신했다. '비포 애프터'를 보는 것처럼 신수가 훤해졌다. 복부와 둔부의 털뭉치(나이가 들곤 빗질을 거의 안해줬다)를 슥 민 자리엔 분홍 맨살이 드러나고, 낫처럼 길어진 발톱이 가지런히 손질되고, 누렇게 변색된 입 주위 털은 반절로 짧아졌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한 건 벤의 목주름. 박박이가 된 녀석이 똬리를 틀고 엎드려 있을 때면, 털 아래 숨어있던 겹겹 주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귀여워 뒤통수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목덜미를 오랜 시간 쓰다듬었다.


하지만 벤은 미용을 내켜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 동물병원 미용실을 갈 때면, 녀석은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곤 했다. 그 낌새를 알았던 지라, 녀석을 속이기도 했다. 산보 가는 척하면서 순식간에 미용실로 들어갔다.


벤은 눈치가 빨랐다. 미용실 전방 100m에 들어서는 순간 줄행랑치고, 짖고, 주위를 뱅뱅 돌았다. 낯선 공간에 몸을 맡기는 게 고역이었을 게다.


13살이 지나곤 '셀프 미용'을 택했다. 바리깡과 미용가위를 구입해 손수 깎였다. 가위는 늘 아빠가 잡았다. 어릴 적 미용이 순수 미용이었다면, 개 나이 칠십인 녀석의 미용은 이발에 가까웠다. 사람으로 치면 두상 선을 따라 짧게 치는 그런 손질.  


털도 많이 빠졌다. 일흔 노인의, 성긴 모발을 똑 닮은 녀석의 털. 아빠가 가위를 잡으신 모습을 몇 번 봤다. 욕실 바닥에 수북이 쌓이던 털은 해가 갈수록 줄었다. 노견이 되곤 이발을 다 마쳐도 한 움큼이 채 나오지 않았다. 말년엔 거의 박박이로 지냈다.


늙은 개 하면 저는 다리, 굽은 등부터 생각한다. 하지만 노견도 아름답다. 황변한 녀석의 털은 옷매무새를 돋보이게 했고, 천연 박박이가 된 후론 바디 라인이 드러나는, 늘씬이가 됐다. 거동은 불편해도 우아하게 걸었고, 천둥벌거숭이에서 품위있는 노신사가 됐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노견 콘테스트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다. 책 'My Old Dog'의 저자 Laura Coffey는 My Old Dog Contest라는 이벤트를 열고 있다. 노령견 사진을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해쉬태그 #MyOldDog와 함께 올리면, 수상자를 선발해 선물을 증정한다. 노견은 아름답다.


두 박박이 큰 녀석 벤(오른쪽)과 작은 녀석 베니. 각각 15살, 5살 무렵.

 



벤과의 5600일 - 프롤로그

이야기를 시작하며


벤과의 5600일① 대낮의 실종

8월 땡볕, 가출, 도깨비풀


벤과의 5600일② 녀석의 간식들

천하장사 소시지


벤과의 5600일③ 벤과의 러닝

형, 이것밖에 못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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