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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현 Mar 19. 2024

클리셰에 낚였어요


상투적인 표현이라는 뜻의 클리셰cliche라는 말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은 말이다. 사랑을 고백하거나, 정치적인 선언을 하거나, 문학작품에서 사용될 때, 클리셰는 별다른 고민 없이 관례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을 말한다. 좋은 느낌으로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특히나 독창적이고 오리지널한 개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 클리셰는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의 표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클리셰는 문자화된 표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음악에도, 예술에도, 영화에도 사용될 만큼 클리셰라는 말은 의미와 용법의 영역을 넓혀왔다. 예를 들어, 청춘남녀가 대범하게도 으스스한 빈집에서 사랑을 나눌때 하키 가면을 뒤집어 쓴 누군가가 도끼를 들고 나타난다. 이런 장면은 헐리우드 공포영화의 대표적인 클리셰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맞닥뜨리게 될 갑작스러움과 놀람을 예상할 수 있게 된다.  드라마의 클리셰도 비슷하다. 어느정도 극이 진행되면 대부분 주인공이 나누는 사랑의 패턴이나 가족간의 비밀이 눈에 선하게 드러난다. 극의 전개와 함께 관객은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에 쾌감을 느낀다. 클리셰는 정신적인 수고를 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배치될때도 많다.  


클리셰는 활자조판공들의 작업에서 파생된 말이다. 과거에는 인쇄를 할 때 각각의 글자를 새긴 조판글자를 맞춰 넣어서 작업을 했었다. 한 페이지에 필요한 조판을 모두 프레임에 끼워넣고 그것을 마치 판화를 찍어내는 것처럼 찍어내어 문서를 인쇄한 것이다. 이때, 각각의 글자를 끼워넣는 일은 정말 꼼꼼한 중노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현에는 속담이나 격언처럼 반복되는 표현들이 있었고, 그럴 때는 글자를 하나하나 넣지 않고 미리 준비해둔 활자들 한꺼번에 채워넣을 수 있어서 그나마 활자를 집어넣는 일이 수월해졌다. 마치 워드 프로그램에서 상용구로 등록된 표현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이라는 글자를 쓰면, 뒤로 ‘안녕하세요’라는 표현이 제시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한 묶음으로 집어넣는 조판 덩어리를 프랑스어로 클리셰cliche라고 불렀다. 클리셰는 인쇄공들 사이에서 사용되던 일종의 그들만의 은어jargon같은 것이었다. 


클리셰cliche라는 말에는 일종의 의성어같은 성격이 있다. 금속으로 된 조판글자를 판에 집어넣을 때, 쇠끼리 부딪히면서 ‘딸깍’라는 소리가 났기 때문에 cliche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소리를 표현하는 말은 현재 컴퓨터에서 메뉴를 마우스로 선택할 때 사용한다. 우리가 ‘클릭click’이라고 부르는 말이다. 실제로 ‘클릭’은 마우스를 누를 때 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물들이 딱 맞춰지는 사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클릭은 현실의 돈과 같다. 클릭이 많아지면 돈도 많아진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클릭 미끼’가 넘처난다. 사람들로 하여금 클릭을 유도하게 하는 것을 ‘클릭-베이트’click-bait라고 한다. 흔히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낚였다고’표현하는 데에는, 원래 거기에 ‘낚시의 미끼’라는 뜻의 bait가 쓰였기 때문이다. 

창의적인 관점에서, 혹은 문예적인 관점에서 상투어는 썩 좋은 점수를 얻기 어렵지만, 상투어는 나름대로 꽤 유용한 측면이 있다. 사용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읽는 사람 모두에게 오독과 오해의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가독성이 좋아서 쓰는 시간도 읽는 시간도 줄일 수 있다. 


어려서는 어떻게든 자신만의 표현을 찾으려고 했었는데, 이제는 어느정도 상투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꽤 가성비가 좋은 글쓰기 전략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상투적인 표현은 누가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들이 난무하는 SNS를 보면 차라리 식상한 클리셰의 미덕이 더 의미있게 느껴진다.


인터넷과 SNS, 신문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와 표현들은 대부분 지나치게 극적일 정도로 과도하고 처절하고 극단적이다. 의미의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해진 까닭이다. 너도 나도 서로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다 보니, 정작 사태에 적확한 단어나 표현은 사람들에게 잘 와닿지 않게 된 것 같다. 공허하게 부풀어오른 의미로 충전된 단어들이 너무나 많다.

어릴때만 해도 좋아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감정은 분명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좋아한다는 말은 페이스북에서 클릭할때나 만나는 단어가 되었다. 절망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절망을 느끼는 사람들보다 한번도 느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들이 더 잘 쓰는 말이 된 것 같다. 뉴스를 보면 온통 대란투성이다. 전쟁을 겪은 세대들의 경험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워낙 쎈 단어들로만 둘러싸인 미디어 환경에서, 소소하게 일상을 묘사하는 말들은 점점 시들어간다. 한번 쾌락에 익숙해지면 그 다음으로 더 자극적인 쾌락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단어와 말들은 한번 커져버리면 다시 줄여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단어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이 예전에는 중학생들에게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옆반 여학생에 대한 마음을 좋아한다고 말할지, 사랑한다고 말할지를 고민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표현하려는 사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보다 자신이 사용할 단어의 액면가와 실제보다 훨씬 더 과장된 의미의 극적효과를 더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선택된 단어는 마치 운동회날에 하이힐을 신고 가는 것처럼 꽤나 병적으로 어색하다. 


그러다 보면 과거의 언어가 현재의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교묘한 말을 잘하고 겉보기만 좋게 꾸미는 사람은 공자가 가장 혐오했던 부류였다. 중학교때 우리는 그것을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고 배운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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