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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Jan 03. 2020

'조금 힘'이 되는 말들

박준『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시인이 첫 산문집을 펴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짧은 글을 모아놓은 책으로, 에세이집이나 산문집이라고 말해도 될 듯하다.

  에세이집을 읽는 이유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작가의 사적인 기억과 이야기를 엿보려는 의도. 작가는 소설이나 시 같은 장르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곳엔 (엄격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규칙과 패턴이 있다. 그런 형식에서 벗어나, 작가가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풀어내는 모습을 사람들은 에세이에서 기대하곤 한다.

  다른 하나는 읽는 우리의 감정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에세이를 읽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예민한 감성에 빠져든다. ‘위로’나 ‘공감’을 전하는 에세이집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정확한 표현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발견하곤 한다.

  에세이집을 읽는 두 가지 이유. 타인의 사적인 내력을 엿보거나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찾아내기 위해서. 이 두 이유에서 보면 박준 시인의 산문집은 다소 남다르다. 이 산문집에는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자주 등장한다.


 “그해 인천 // 그해, 너의 앞에 서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 내 입속에 내가 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행신 // 사람에게 미움받고. 시간에게 용서받았던.” “그해 연화리 // 늦은 밤 떠올리는 생각들의 대부분은 / 나를 곧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글을 읽고 박준 시인이 인천과 행신, 연화리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순 없다. 박준 시인은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명확한 시간순서나 세세한 정보는 담겨 있지 않다. 존경하는 선생님의 모습이나 애인이 했던 말, 아버지가 좋아했던 영화가 조각조각 등장할 뿐이다.

  또한 이 산문집은 요즘 흔히 유행하는 에세이집처럼 ‘다 괜찮다’고 말하며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전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조금 힘’이 되겠다는 시인의 말. 시인은 섣부른 위로나 성급한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그리고 세심하게 자신이 느낀 감정을 서술한다. 이는 그가 시를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라지는 것들의 유언을 받아 적는다는 점에서 나의 시는 창작보다는 취재나 대필에 가깝다.”


  시인은 말한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이 산문집에서 시인은 자신의 비참한 과거를 꺼내며 눈물을 자아내지 않는다. 성공담을 언급하며 우리에게 용기를 돋우지도 않는다. 다만 “당신을 만나는 꿈을 만들어 꾸고 싶”던 시절, “가득 담은 따듯한 밥 한 공기와 초간장 한 종지를 유년의 아버지에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들려준다. 그리고 사라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어떤 말들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사소하고 작은 일들을 좋아한다”는 시인의 마음. 그 다정한 마음이 써 내려간,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기쁜 이야기가 이 산문집에 담겨 있다.

  이 책을 읽고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크게 울면서 슬픔을 승화하거나 상쾌한 위로를 얻지도 못할 것이다. 다만 ‘조금 힘’이 되는, 담아두고 싶은 말들이 마음속에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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