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펐다.’라는 말은 자연스럽지만, ‘슬프고 있다.’라는 표현은 어색하다. 슬픔은 지속하는 ‘상태’보다는 매듭짓고 끝내는 ‘행위’에 가깝다. 우리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 크게 한 번 울고 잊는다. 하지만 잊지 못하는 상실도 있다. 상처가 너무나도 큰 나머지 상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미 떠나버린 대상을 마음속에 담아 두는 상태. 이것이 프로이트가 ‘슬픔’과 대조하며 설명한 ‘우울증’이다.
슬픔은 상실을 인정한 뒤 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우울증은 상실을 인정하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잊지 못하며, 일상으로 돌아오기 힘들다. 현실논리에 있어 나쁜 쪽은 당연히 우울증이다. 부정적인 감정의 상태가 지속하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휩쓸고 지나가버리는 슬픔도 있는 반면, 서서히 스며들어서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슬픔도 있다. 우리는 슬픔이라는 과정을 통해 지난날을 돌이켜 보거나 떠나버린 대상을 이해해 보려고 이모저모 다시 들여다본다. 어떤 것은 지나가버렸을 때, 잃어버렸을 때 오히려 눈에 더 잘 들어온다. 상실의 빈자리가 그것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경우다.
작가는 ‘함께 우는 사람’이 아니다. 작가는 ‘천천히 우는 사람’, ‘가장 나중에 우는 사람’이다. 작가는 모두가 울 때 울지 않고,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 고민하고, 그 고민을 작품으로 내놓는다. 슬픔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사라지지 않고 오래오래 기억되는 슬픔은, 누군가를 작가로 만든다. 혹은 누군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슬픔을 잊지 않고 슬픔과 함께 머물 때, 우리는 한 발짝 다른 세상에 다가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