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부페이라
이른 아침이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연다. 오 이런! 구시가 언덕 위에 있는 숙소는 뜻밖에 멋진 전망을 선사한다.
지난밤, 기차역에 내려 좁고 너저분한 골목을 헤집으며 집을 찾느라 고생한 후 낡아빠진 숙소를 발견하고 다시 한번 실망했던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밤을 보냈다. 침대조차 눅눅했다. 날이 밝으면 당장 숙소를 옮겨야겠다고 다짐한 나는 아침이 오기 무섭게 다락에 올라 옥상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런 황금빛 아침이라니!
잔뜩 마음을 구겼던 나는 탄성을 지르고 카메라를 켜며 법석을 떤다. 바닷가 언덕을 뒤덮은 하얀 집들, 그 위로 동이 튼다. 황홀경이다. 옥상에 놓인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검정 테이블과 세월에 부식되어 희끗희끗해진 붉은 철조망이 제 역할인 듯 황금빛 태양을 안은 채 배경이 된다. 형언키 어려운 눈부신 아침이다.
나이 탓인지 뜨는 것보다 지는 것에 익숙했던 나는, 일출보다 일몰을 연민했다. 왜 저토록 빨리 지는지, 나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태양 앞에서 안타까움에 떨곤 했다. 뜨는 것의 황홀함이라니 낯선 감정이다. 탄생의 고통인지 일출은 진행이 더디다... 과실이 천천히 익어가고 사람의 사람됨이 세월을 필요로 하는 원리인가 보다.
옥상에서 일장관을 목격한 나는 두려움을 거두고 집을 나서 어둑한 비탈길을 내리 걷는다. 신신한 새벽의 바다를 만나기 위해서다. 구시가의 골목길은 경도 30도를 넘어 보이는 까끄막이다. 평지는 하나도 없는 마을. 게다가 사방 3cm 정도의 부정형으로 잘린 돌이 깔린 바닥은 보기에 좋으나 걷기에는 퍽 불편하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서는 도저히 못 걸을 길이다. 포르투갈은 리스본을 비롯해 나라 전체의 도로가(고속도로를 제외하고) 거의 이런 돌바닥이다. 그로 인해 도시는 무게감과 역사성을 지닌다. 해양 국가, 정복의 시대 대 제국이었던 포르투갈, 그 영광이 이 작은 시골 마을에도 닿았던 모양이다. 한낱 여인의 불편한 걸음이야 뭐가 문제일까. 나는 투덜대던 마음을 바꾸어 하늘을 우러른다.
갈매기 떼가 파르락 날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로 지나간다. 갈매기 똥이 비처럼 떨어진다. 하마터면 새똥 세례를 받을 뻔했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는 개똥 새똥 천지다. 나는 이 신선한 자연의 오물을 피하기 위해 다시 바닥을 보며 걷는다. 10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파도 소리가 들린다. 연이어 바다가 보인다. 이렇게 가까웠다고?! 엊저녁, 알부페이라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왔던 길은 언덕을 바깥으로 빙 돌았던가 보다. 숙소에서 해변으로 닿는 길은 한 사람이 겨우 걸을 만한 폭이니 자동차가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마을 뒷문으로 들어온 셈. 덕분에 내 시야는 망가졌고 이곳에서 사흘을 어떻게 보낼지 걱정이 앞섰던 게다.
파도 소리 따라 걸으니 구시가 중심에 이른다. 작은 광장이다. 광장을 중심으로 언덕을 향해 뻗은 골목이 방사선을 이룬다. 골목에는 주택과 선술집, 조악하지만 따듯한 느낌의 기념품점들이 들어섰다. 아직 문을 연 집이 없어 유리에 얼굴을 갖다 대고 안을 들여다본다. 눈요기에 좋다. 숙소 상태뿐 아니라 뭐 이런 꾀죄죄한 곳에 숙소를 잡았을까 하며 불평으로 부풀었던 마음이 누그러진다.
지중해의 더위를 피하느라 하얗게 집을 칠했다는 알부페이라, 아무 데나 카메라를 조준해도 모두가 그림이다. 바다에 닿으니 안개를 헤집은 해가 다섯 뼘쯤 수평선 위에 올라섰다. 언덕 위에서 황금빛 자태를 뽐내던 태양(숙소 옥상에서 맞은 일출 광경)은 막 탯줄을 자른 아이처럼 그를 조력하던 노란빛을 걷어내고 거대한 바다 위에 빛나는 위엄으로 떠 있다.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일출을 보고 마음이 한껏 여유로워진 나는 다시 마을 안쪽으로 향한다. 종일 골목을 누비며 걷다 한적한 카페에서 책을 읽어야지. 그러다 노을이 지면 어슬렁 몸을 일으켜 알부페이라의 저녁을 만나러 갈 작정이다. 연중 섭씨 5, 6도를 내려가지 않는다는 알부페이라, 1월 초순인 지금 기온은 저녁인데도 13도 전후다. 온화한 지중해 바람이 살갗에 닿는다. 쉽게 내리고 쉬이 그치는 비도 매력이다. 다만, 저녁노을이 질 무렵엔 비가 그쳐 주기를. 선명한 주황을 보고 싶으니 말이다.
노을을 기다리며 바닷가 레스토랑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는다. 음식이 나온 것을 두고 주황으로 물드는 하얀 언덕을 포착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갈매기 한 마리가 식탁을 덮친다. 흰 밥알이 바닥으로 흩어지고 순식간에 마늘빵과 치킨 한 조각을 빼앗긴다. 내가 일몰을 기다리는 동안 녀석은 내가 자리 뜨기만을 기다렸던 게다. 테이블 주변을 배회하던 녀석의 마음이 읽혀 허허 웃음이 난다. 메뉴는 다시 주문했고 덕분에 식비는 두 배가 든다.
어찌 되었든 하루의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보았다는 것이다! 아침에 황금빛을 연출하던 하얀 언덕이 주황으로 물들고 있다. 황금빛과 주황의 세밀한 차이, 그러나 확연한 차이. 말했듯이 일몰의 장관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구름조차 많은 날, 빠르게 바닷속에 잠기는 태양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센티멘탈해진다. 그리고 결심한다. 황혼에 매몰되지 않기로. 다만 저 붉은빛을 경외하기로.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기로! 나는 바다로 빠져버린 태양 앞에서 망설임 없이 발을 돌린다. 황금빛 태양을 맞으러 간다.
*지난 1월 5일부터 60일간 유럽 여행 다녀왔습니다. 알부페이라는 여행 초입에 들렀던 도시죠. 알부페이라는 포르투갈 남부의 작은 해안 도시로 포르투갈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리기도 합니다.
<좋은 수필> 2023.7월호 게재
뜨는 해에 노랗게 물든 골목길 주택들. 이때가 오전 8시 경이다. 왼쪽 길로 오르면 내가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가 나온다. 운치 있는 골목 바닥, 걷기는 매우 힘들다.
절벽 위에 자리 잡은 포르투갈 남부 도시 알부페이라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