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온기로 기억되는 여행
타인에 대한 배려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어떤 심리학자는 배려를 이기심의 발로라 한다. 남을 도움으로써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 저마다 바쁜 시간을 사는 현대에 케케묵은 심리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까. 포르투갈에서 '타인'을 여러 차례 만났다. 나는 그들의 친절을 대할 때마다 그야말로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나 자신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친절 경험 1)
포르투갈에서 엿새를 보내고 오늘 스페인 세비야로 넘어간다. 알부페이라에서 세비야까지는 알사 버스로 약 4시간 반이 걸린다. 나는 예매한 버스표에 적힌 대로 리베르다데 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리베르다데 역으로 가 주세요. 내 행색으로 여행객임을 알아차린 택시기사가 다시 어디로 가느냐 물었다. 그는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아임 거나 고우 투 세비야 I'am gonna go to Seville. 나는 그에게 티켓을 보여주었다. 9시 버스를 타야 하는데 예약해 둔 아침식사가 늦어지는 바람에 시간이 빠듯해졌다. 8시 반이 다 되었다. 마음이 바쁜 나는 시계를 봐 가며 9시 차를 타야 하니 서둘러 달라고 했다. 그가 난감해한다.
세비야에는 버스 터미널이 두 군에 있는데 리베르다데 역은 시내버스만 드나든다는 것이다. 세비야 가는 알사 버스는 버스 스테이션이 따로 있다고. 당황한 나는 기사에게 차 표를 다시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버스 타실 곳은 리베르다데 역입니다. 30분 전까지 오셔서 종이 티켓으로 교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영어와 포르투갈어로 명확히 쓰여 있다. 그도 나만큼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그는 내 티켓을 의심스럽게 들여다보면서 거듭 세비야에 가려면 다른 버스 스테이션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사람을 믿어야 하나,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인터넷 예매 사이트를 믿어야 하나... 나는 이곳 사람인 택시기사를 믿기로 했다. 좋아요, 기사님이 아는 곳으로 가 주세요. 택시 기사는 우선 리베르다데 역에 들러 확인한 후 아니면 알사버스 터미널로 다시 가자고 한다. 좋습니다.
결국 택시는 리베르다데 역에 잠시 멈추었다 다른 버스 스테이션으로 달렸다. 역에 도착하자 그는 나와 함께 차에서 내려 나보다 먼저 역 사무실로 달려갔다 돌아온다. 여기가 맞아요.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택시비를 지불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받고도 돌아가지 않고 택시 안에서 나를 보고 있더니 다시 내게로 왔다. 세비야행은 1번 플랫폼입니다. 저어기요. 그가 손가락으로 공중에 매달린 번호들을 가리켰다. 엉뚱한 버스표를 들고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동양 여자가 그로서는 몹시 걱정스러웠던 눈치다. 그는 결국 내가 버스를 탈 때까지 기다렸다 내 가방을 옮겨 실어준 후 떠났다. 세비야는 종점이니 중간에 내리면 안 된다는 마지막 당부까지. 나는 택시 기사의 배웅을 받으며 포르투갈을 떠났다. 여행의 기억보다 더 충만한 사람의 온기로 나의 체온은 1도쯤 상승했다.
친절 경험 2)
포르투에서 코스타 데 노바 줄무늬 마을에 갈 때였다. 비는 억수같이 내렸고 그곳까지 가는 버스 편은 모두 끊긴 상태였다. 단체 여행 팀에 끼어 볼까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나는 택시를 세워 코스타 데 노바까지 가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요금이 80유로쯤 나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택시에 올랐다. 택시는 1시간 반 정도면 닿을 길을 2시간 넘게 달리고 있다. 젖은 도로와 시야를 가리는 폭우로 차가 속도를 내지 못한다. 도로에는 지나다니는 차도 거의 없다. 돌아올 일이 걱정된 나는 코스타 노바를 둘러보는 동안 나를 기다려 줄 수 있겠는지 또 물었다. 물론 기다리는 시간만큼 나는 비용을 지불할 작정이었다. 예산을 넘어선 엄청난 지출이지만 하는 수 없었다. 내친김에 포르투갈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아베이루와 상벤투 역까지 들러 달라고 했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 택시 미터기가 95유로를 넘었다. 그러자 그는 요금이 많이 나온 것에 미안해하며 미터기를 정지시켰다. 이후 그는 95유로만 받고 나의 하루치 여행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이 사람의 호의는 '나의 행운'이었을까. 그리 생각한다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삭막한 것인가. 그의 마지막 인사는 자신을 믿어주어 고맙다는 것이었다. 손님 끊긴 날 장거리 승객이라니, 그에게 나도 '행운'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피차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의 호의를 나의 행운으로 훔치는 것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이다.
친절 경험 3)
알부페이라 기차역에 내려 숙소를 찾아가던 날은 또 어땠나. 다소 외진 곳에 있던 게스트 하우스를 찾느라 나는 해 떨어진 골목길을 몇 시간이나 헤맸다. 그날도 나를 태워주었던 인도 출신 택시 기사가 아니었다면 나는 크게 낭패를 볼 뻔했다. 영어와 포르투갈어가 능했던 그는 길가는 동네 사람을 붙잡고 묻고 또 물어가며 끝내 집을 찾아주고 떠났다.
여행은 사람의 온기로 기억된다.
여행의 기억은 여행지에서가 아니라 사람의 온기에서 온다. 서울을 떠나기 전 지인들의 염려는 한결같았다. 소매치기 조심하고 낯선 사람 조심하라는 것. 도우로 강 가에서도, 알부페이라 해변에서도 혼자 거니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건 사람들 중 위협적으로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내게 사진을 찍어 주고, 멋진 뷰 포인트를 알려 주었으며 빨간 불이 들어온 내 휴대폰을 충전해 주었다. 지레 의심하고 긴장하여 경계의 몸짓을 보낸 나는 얼마나 못난이였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