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래 Oct 28. 2020

죄송한데, 제가 지금 다이어트중이서요

어느 소심한 다이어터의 속사정

어떤 다이어터의 하지 못한 이야기

'매운 토마토 라면’ 나는 이 기묘한 음식에 중독됐던 적이 있다. 회사 앞에 있는 작은 일본 라면집에서 팔던 이 메뉴는 짬뽕 같기도, 스파게티 같기도 했다. 사장님이 일본에서 직접 전수받고 연마한 레시피를 3년간 현지화시켜 탄생한 이 라면은 먹을 때마다 진땀 나게 매웠지만 눈물 나게 맛있었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

 점심 장소를 정할 때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곳을 유도했고, 마음씨 좋은 동료들은 기꺼이 그곳에 가주곤 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그 라면이 먹고 싶을 때마다 내게 점심을 제안하기에 이르렀고, 나중엔 이상한 소문(내가 그 가게에 지분이 있다, 사장님 조카라더라)도 났다. 점심, 저녁 두 끼를 연속으로 먹은 적도, 출근하는 5일 중 4일을 가던 주도 있었으니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내가 그곳에 가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알려주지 못했다. 그곳을 찾는 결정적인 이유는 ‘다이어트'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는 면 종류(생면, 우동면, 곤약면)를 고를 수 있었고, 내 선택은 늘 곤약면이었다. 보통 젤리로 만들어 먹거나, 메추리알 조림에 곁들여 먹는 곤약은 100g당 5kcal 정도의 저칼로리 식품으로, 다이어터들에겐 아주 익숙한 식재료다.


 다이어트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굳이 알리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 곤약면은 내 나름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비밀인데, 제가 지금 다이어트 중이거든요

 직장인에게 다이어트란 사회생활의 일부를 포기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점심이나 저녁시간을 활용하여 형성된 사적인 친밀함은 공적인 일을 부드럽게 출발시키는 윤활유로 기능하곤 한다. 


‘밥 한번’은 업무로 처음 만난 상대의 성향과 입장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절약해주며,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부드러운 관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실제로 전화만으로 일을 할 때는 3초에 한 번씩 버럭 하던 타 부서 선배님이 몇 번의 점심 식사 후에는 친 딸 대하듯 잘해주시기도 했다.)   

  

 그런데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부터 그 ‘밥 한번’이 여의치 않아졌다. 회사 앞 식당가에는 하나같이 고열량, 고칼로리 음식뿐이었다. 국밥과 덮밥, 돈가스와 피자, 짜장면과 탕수육 등 다이어터라면 모름지기 멀리 해야 하는 음식 100선이 사이좋게 줄지어 놓여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발생했다. 내겐 같이 국밥집에 들어가서 “아 팀장님만 주문하세요! 저는 다이어트해야 해서 가져온 샐러드를 먹을 거예요”라고 말하며 주섬주섬 샐러드를 꺼낼 뻔뻔함도 없었고, 점심 식사를 제안하는 동료에게 “제가 요즘 다이어트를 해서요, 저 한 5Kg만 빼면 하면 그때 먹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다.     


‘삐빅- 다이어트에 실패하셨습니다.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워요

 다이어트란 전적으로 ‘나만의, 나를 위한, 나에 의한’ 행위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도와줄 마음도 없는 나와의 외로운 싸움이다. 여섯 시 이후의 천둥 같은 꼬르륵 소리, 스쿼트를 할 때 허벅지가 번개에 타는 것 같은 고통은 오직 나만이 이겨내야 하고, 나만이 이겨낼 수 있다. 그건 고통스럽긴 해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가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은 왜 그렇게 죽도록 싫었을까.      


나를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걱정했다.
출처 : https://pxhere.com/ko/photo/1450419

“저 다이어트해요”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지금도 보기 좋은데 뭐하러 해?”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래, 좀 해야겠더라’라고 생각할까 봐 민망했다.


“저 샐러드 먹어야 해요”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열심히 하네!”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누군 다이어트 안 하나, 혼자만 유난이네’라고 생각할까 봐 창피했다.


결정적으로는 두려움과 창피함을 어찌어찌 이겨내더라도, 다이어트에 결국 실패할 경우, "괜찮아, 지금도 보기 좋아!"라고 말하며 ‘풋, 그렇게 유난을 떨어대더니...’라고 비웃음을 당할까봐 수치스러웠다.      


'실패,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출처 : https://pxhere.com/ko/photo/867723

 실패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물론 어렵다. 그리고 그 실패를 타인에게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것은 더 어렵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의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나 자신에 대한 실망보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더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실패를 피하기 위해 도전 자체를 피하게 되었고, 나아가 모든 것을 일단 피하고 보는 극강의 ‘회피형’ 인간이 되어버렸다. 인간관계에서 몇 차례의 다툼과 균열을 경험하고 나서는 곁에 누군가를 두는 일 자체를 피해버렸고, 조금이라도 논쟁이 벌어질 것 같으면 나는 자발적 패배자를 자처했다. 중요한 자격증이나 시험을 신청하면서도 ‘보는 것에 의의를 둔다’고 자위하며 미리 다음 시험 일정을 확인하곤 했다.


 매번 실패할 경우를 상정해두고, 그때마다 들이댈 여유분의 핑계를 주머니 속에 넣고서는 만지작거리다가, 실패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미는 것. 대부분의 도전은 남들에게 최대한 공개하지 않되,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허세를 부리는 것. 새로운 도전은 실패했으나, 적어도 현재 가진 것을 잃지는 않았으므로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 삼는 것. 


 그것이 성공보다 실패의 경험이 많고, 아직도 실패에 익숙해지지 않는 내가 선택한 최선의 방어책이었다. 성공을 향해가는 강한 의지가 필요한 사람도 있지만 실패를 가정한 수많은 대비책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며, 매번 성공할 수는 없으며 모두가 위너가 될 수는 없는 법이라며, 나를 그렇게 합리화하며 살아왔다.      


'당신의 몸은 실패했나요?'

출처 : Unsplash @jenandjoon

 다이어트의 목적은 건강, 활력, 자기만족 등 다양하지만 ‘타인의 시선’이라는 요인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호리병 같은 허리라인, 주먹 하나쯤 너끈히 들어갈 수 있는 허벅지 사이의 공간, 예쁘게 솟은 애플 힙, 아무 옷이나 걸쳐도 시크하게 뿜어져 나오는 셔츠 핏은 결국 사회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성공한 몸매’의 기준이며, 그것에 부합하지 못하는 모든 보통의 몸매를 암암리에 ‘실패’로 규정한다.


 나 역시 ‘외면보다 중요한 내면’을 보려 노력하고, ‘건강한 내면을 가진 나’를 지향하면서도, 매일 인스타그램 속 핫바디들을 탐닉했고, 거울 속 나와 자주 비교하며 좌절했다. 내 몸무게가, 내 체형이, 내 사이즈가 '성공 혹은 실패'로 평가받는 대상이 아닌 세상이 도래하길 희망하며, 나 역시 내 몸을 평가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력을 했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 때문에 ‘날씬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지우고 싶고, 내 욕망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비겁함을 버리고 싶고, 실패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방어심리가 만들어낸 회피 성향을 바리바리 묶어서 갖다 버리고 싶지만, 그 어느 것도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가시화하고, 주변인에게 알리는 것만으로 성공률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에 동의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아마 남들의 시선에 대한 과한 부담에 깔려 죽고 말 것이다.    


'소심한 다이어터와 매운 토마토 라면'  

출처 : Unsplash @kaip

 내게 실패는 실패일 뿐이다. 그것으로부터 뭔가 배운다는 것도, 결국 훗날 성공을 전제로 한 영웅담에 쓰일 소재일 뿐이다. 여전히 실패는 두렵고,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다. 따라서 지금 당장 나의 욕망을 단번에 거세시키거나,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개O마이웨이’로 살 수는 없다. 


 사무치게 후회되는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결국 비슷한 선택을 할 것을 직감적으로 알 듯,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 아마 나는 비슷한 성향으로 살아갈 것이다. 핵심능력이 '눈치보기'인 사람의 내가 눈치껏 파악한 나이므로 그렇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로 나는 조금 찌질하거나 모자란 나의 성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인정하며,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최선만 다하기로 했다. 내가 무엇을 더 견디기 힘들어하는지, 무엇을 먼저 극복하고 싶어 하는지, 어떤 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선에서, 참을 수 있을 만큼만 참고, 양보할 수 있을 만큼만 양보하기로 했다. 

출처 : 스페이스 클라우드 핵심능력 테스트

 모든 약속을 거절하고 골방에서 혼자 샐러드를 먹는 대신, 사장님과 일면식도 없는 내가 조카 소리를 들을 만큼 뻔질나게 매운 토마토 라면 가게에 드나들었던 것은 '다이어트 목표 달성'의 관점에서만 보면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다이어트를 조금 오래 하게 되더라도, 동료들과 함께하는 점심시간이 주는 즐거움과 효용감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평범한 보통 체중으로 살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긴 하지만, 활동을 심하게 제약하거나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모를 사탕껍질 같은 옷을 입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목표와 성향을 인정하고 행동에 우선순위를 세우다 보니,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 그리고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이 자연스레 구분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오랜 고질병 같은 '회피형 성향'도 극복하고 싶은 원수인 동시에, 쉽게 마음의 안정을 찾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준 다정한 친구 같기도 했다. 이기고 지는 것, 잃고 얻는 것에 큰 욕심이 없는 내게 혹자는 '무슨 재미로 사냐'고 하지만, 사실 나는 딱히 사는 게 재미없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힘든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 그리고 타인에게 노출시키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은 안정적인 삶에 파동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내 나름의 생존비책이었을 것이고, 나는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출처 : Unsplash @jeremybishop

 다이어트에 도전하다 보면 사회가 규정한 '성공한 몸'에 대한 삐뚤어진 기준과 시선, 그리고 그것들을 다 무시할 수 있을 만큼의 높은 자존감을 갖지 못한 나 등 모든 것이 비관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저 큰 이유 없이 48kg이 되기 위해 무작정 굶고 달리던 시절의 나와 같지 않다. 


 어렵긴 하지만 차차 '라인'보단 '근육'으로, '시선'보단 '건강'으로 다이어트의 목적을 바꾸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타인의 시선을 내 몸에서 덜어내고, 나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천천히 내 몸을 사랑하려 노력 중이다. 


 지금껏 그래 왔듯 두드러지게 드러내지는 않는 선에서, 내가 견딜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도전의 목적과 의미를 꾸준히 고민하고, 설사 도전에 실패하더라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만큼 나를 지키는 일에 조금 더 관심을 두고 싶다. 


 그러다 보면 실패하는 나도, 실패를 드러내는 나도 지금보다 덜 공포스럽게 느껴질 것이고, 다정하지만 게으른 내 친구 '회피형'과도 조금의 거리두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아가, 언젠가 '오직 나'만을 위한 다이어트를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오늘은 우선 이 정도 용기 낸 나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의미에서, 오랜만에 맛있는 걸 먹으러 가야겠다. FIN.



이전 08화 헬스장 몸짱 아저씨들이 마시던 물의 진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