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생사진은 무엇인가요?
언제부터 '인생'이라는 말이 단어 앞에 관용어구처럼 붙기 시작했을까? 인생맛집, 인생영화, 인생커피, 그리고 인생사진 등등... 첫 의미는 분명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무언가'라는 뜻이었을 테지만, 인생이 길어지는 것과 반비례하여 '인생 무엇'의 갱신 주기는 점점 빨라진다. 지난달쯤 '대박 완전 인생사진이야!'라고 말하며 내가 찍어준 사진을 마음에 들어하던 친구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그새 다른 사진으로 바뀌어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람들의 인생사진 갱신 속도가 빨라지는 현상은 카메라 어플의 탄생이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기미와 잡티를 없애주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얼굴형, 눈동자 색, 코 높이, 주름까지 모두 조정이 가능하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유명한 한 어플의 이름처럼 ‘너 같은(U LIKE) 너’를 만들어주는데, 누가 봐도 '셀기꾼(셀카+사기꾼)' 티 나게 팍팍 보정이 들어가던 과거와 달리, 분명 나는 아닌데 묘하게 나 같은 사진은 은근 중독적이다. 요새는 ‘몸매 보정’까지 완벽하게 되는데, 원래 내 몸인 것처럼 나를 늘리고 줄이며 반죽해준다.
무수히 많은 종류의 카메라 어플이 있다. 긴 여행을 앞두고 옷장을 보다가 한숨이 나왔다. 작년에 입었던 거의 모든 옷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행인데 엉덩이가 헤진 청바지 한 장만 가져갈 순 없지'라는 마음으로 시착이 비교적 자유로운 스파 매장을 찾았다. 같은 디자인의 바지를 사이즈별로 세 장을 챙겨서 탈의실로 들어갔다. 제일 큰 사이즈부터 입어보기 시작했다. 큰 옷으로 시작해서 점점 작은 옷을 입는 것이 기분이 덜 상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다리를 집어넣는 순간, 직감적으로 안다. '아, 작다.'
친구들은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할 것 같고, 엄마는 좀 끼는 것 아니냐고 할 것 같은 두 번째 사이즈에서 멈췄다. 최근 신나게 먹고, 격정적으로 누워 있었던 것에 비해서는 괜찮은 인과응보라고 생각하고 거울을 보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무줄 밴드에 허벅지 통도 넓어 꽤 날씬해 보이는 와이드 팬츠인데도 말이다.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바지를 만지작거리며 문득 생각했다. '아, 여행 가기 싫다, 사진 안 예쁘게 나올 텐데...'
여행을 위한 사진, 사진을 위한 여행
'대충 찍어도 인생샷을 만들어주는 어플이 생겼으니, 여행도 대충 하고 가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오히려 그렇지가 못하다. 에메랄드빛 바다, 정령이 살 것 같은 숲 속 등 비현실적인 공간 속의 나를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줄 어플이 있다. 내가 조금만 예뻐도 어플은 나를 작정하고 예쁘게 만들어줄 텐데, 그렇다면 나는 이니스프리 CF를 찍는 윤아가 된 듯한 마음가짐으로 여행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완벽한 풍경 속, 완벽한 인생사진을 남기기 위해 꽤 오랜 기간 다이어트를 하고, 떠나기 일주일 전쯤 머리를 하고, 전날쯤 손톱에 스티커를 붙이는 등 말이다. 그런데 여러모로 준비가 미흡하니,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탈의실에서 바지를 입다가 맥없이 김이 빠지고 마는 것이다.
출처 : Unsplash @stvgale 나는 예쁜 옷을 입고,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을 가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1년에 한 번씩 해외여행 가기 위해 회사를 다닌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여행 자체를 좋아했고, 그저 예쁜 곳에 간 김에 예쁜 사진을 찍고 싶다는 평범한 욕구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인정해야 했다. 나는 여행지에서 조금 더 예쁜 옷을 입고 싶었고, 인생사진을 한 10장쯤 건져오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에서 한 피드에 올릴 수 있는 최대 장수다.)
황홀한 풍경 속, 나인 듯 나 같지 않지만 묘하게 나와 닮은 그 사진을 점점 더 원하게 되는 동시에, 그것이 실재하는 내가 아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좁은 탈의실에서 나는 완벽하게 깨닫고 말았다.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사실이 여행에 대한 기대까지 갉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도 결국 인생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을 가는 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출처 : Unsplash @maxeylash
어린 나이의 학생들에게서 ‘꾸밀 권리’를 빼앗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치마를 정강이까지 입고 다니던 모범생이었던 나도 교복 안주머니에는 항상 입술을 빨갛게 해주는 니베아 틴트가 있었다.
그러나 온 사회와 어른들이 나서서 ‘너는 더 예뻐질 수 있다’고, ‘더 갸름해지고, 눈이 커지고, 날씬해질 수 있다’고 말하며, 자신들의 말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미디어 환경을 제공하고 그럴듯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 아닐까.
생각해보면 어른인 나조차 어느샌가 ‘인생사진’이라는 상품에 현혹되어, 진정한 여행의 의미와 가치를 잃어가고 있었다. 멋진 곳이 아니라 사진이 잘 나오는 곳을 찾아다녔고, 맛있는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니라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파는 곳을 찾아다녔다. 짧고 굵은 다리 콤플렉스를 가리기 위해 여름엔 웨지힐을, 겨울엔 통굽 부츠를 마다하지 않았고, 스타킹이 따뜻하다고 우기면서 한 겨울에도 치마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이 더 많은 곳을 여행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 뒤, ‘자신만의 꾸밈’을 찾길 바라지만,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건 오롯이 어른들의 몫이다. 성장기 아이들이 굶어서 살을 빼지 않는 세상, 독한 화장품을 바르지 않는 세상, 불편한 손톱을 붙이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한 건 어른들의 책임이고, 나 역시 피해자인 동시에 적지 않은 책임이 있는 셈이다.
좁은 탈의실에서 까만 바지 세 벌을 들고 나오며...
출처 : https://peakery.com/one-tree-hill-new-zealand-182m/ 나의 인생사진은 약 8년 전, 뉴질랜드의 북섬에서 찍은 사진이다. 가난한 유학생은 새벽 세시에 도착하는 땡처리 비행기를 끊었고, 하루 30불짜리 데이터 유심 대신 종이 지도를 택했다. 가려던 목적지에서 한참 벗어났지만 마음을 사로잡는 곳에 걸터앉아서 한참을 감탄하다가 졸다가를 반복했다.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사진 찍어줄까?'라고 물어보기에 대수롭지 않게 '네!'라고 대답했는데 그때 찍힌 사진이 마음속 인생사진이 되었다. 당시 나는 쌀보다 스테이크가 싼 나라에서 1년을 살다 보니 10kg이 늘어 있었고, 흰 옷은 낡아 누룽지 색이 되어있었으며, 머릿결은 노란 빗자루 같았다.
어플도 아닌 기본 카메라로, 그것도 앉은자리에서 3초 만에 찍힌 사진에는 충혈된 눈, 떡진 앞머리 못난 같은 것들을 중요하지 않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귀국을 일주일 정도 앞둔 묘한 감정 때문이었는지, 말도 안 되는 풍경과 날씨 때문이었는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사무치게 다정해서였는지, 삼일 내내 듣던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 때문이었는지,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사이즈가 M인지 L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던 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이 명확한 그 여행은 아직까지도 내 '인생여행'이며, 죽기 전에 딱 한 장의 '인생사진'을 꺼내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 못난 사진을 꺼낼 것이다.
나는 나의, 나의 세대의, 그리고 나보다 어린 세대의 사진첩에
앞으로 못난 인생사진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출처 : Unsplash @fuuj 사진 하나로 인해 여행의 기분이 좌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긴 손톱 때문에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고, 몸으로 인해 마음이 다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좁은 탈의실에서 까만 바지 세 벌을 들고 나오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