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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래 Jun 04. 2020

헬스장 몸짱 아저씨들이 마시던 물의 진실

인생에도 가끔은 보조제가 필요하다

'라이브’는 가수가 무대에서 하는 것인 줄만 알았다. ‘라이브 공연’보다 ‘라이브 방송’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해질 만큼 세상은 변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홈트 영상을 틀어놓고 열심히 따라 하는 나의 몸무게는 크게 변치 않았다. 아무리 다이어트는 평생 해야 하는 거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바야흐로 4차 혁명 시대가 아닌가. 나도 시대에 발맞추어 저화질 영상 속 늙지 않는 외국 언니들과 이별하고(레베카 루이스, 클라우디아 쉬퍼 등. 홈트계의 대모님들) 알람을 맞춰두고 실시간 홈트 라이브 방송에 접속한다.

슈퍼모델 클라우디아 쉬퍼 aka 홈트계의 대모님


"다이어트에 약 3920번째 정체기가 찾아왔다"

오늘의 라방 제목은 “#다이어트 #공복유산소운동 #육수줄줄”. 으아 오늘은 전신 운동하는 날이구나. 어제 늦게까지 친구와 와인을 마셔 몸이 무겁다. 다이어트를 시작한 이후, 된장찌개와 냉면을 먹기 위해 삼겹살을 먹는 탄수화물 중독자인 나는 그나마 유혹의 손길이 약한 안주를 먹기 위해 와인바를 찾는다. 그런데 어젯밤엔 변수가 생겼다. 자주 가는 와인바에서 갑자기 라면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라면' 메뉴 이름조차 아방가르드하다. 칠레산 소비뇽 블랑과 신라면, 동서양의 조합은 의외로 괜찮았다. 그냥 고깃집에 가는 게 나았겠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괜찮았던 게 문제다.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무거운 다리를 레깅스에, 어제보다 옆으로 반 뼘 더 자란 것 같은 몸뚱이를 브라탑에 욱여넣었다. ‘이것만 넣으면 반은 성공’이라는 사실은 그동안의 숱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것을 넣지 못하면 오늘 하루는 ‘실패’라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의 다짐은 늘 그런 식이 아니었던가. ‘오늘 아침’ 실패하면 ‘내일부터’가 되고, 화요일에 실패하면 ‘다음 주부터’가 되고, 8월쯤 실패하면 ‘내년부터’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일부터 할까'를 수 백번 고민하다 거의 울면서 몸에 레깅스와 브라탑을 다 욱여넣고 매트를 바닥에 내던지듯 깔았다.


'공복 유산소 운동을 하기엔 내 복이 너무 공하지 않은데..'라고 생각하며 스트레칭을 하는데, 속도 메스껍고 온몸이 밤새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아프다. 아, 어쩔 수 없다. 천근만근 엉덩이를 일으켜 부엌으로 향한 뒤, 최근 즐겨보는 홈트 강사님께 영업당해 지난달 구매한 마법의 가루(운동 부스터, 이하 가칭 렉스)를 꺼낸다. 하얀 가루를 한 스쿱 가득 떠서 물에 섞자마자 가루가 신기루처럼 퍼지고, 보틀 속 물은 오미자차처럼 빨갛고 영롱하게 변한다.


"운동 보조제, 과연 효과가 있긴 한 걸까?"

대충 이런 식으로 덩치가 냉장고만 했던 아저씨들

사실 보조제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헬스장에서 ‘꾸워어!!’ 소리를 내며 벤치프레스를 드는 덩치가 냉장고만 한 아저씨들이 운동 전 뭔가를 벌컥벌컥 마시는 걸 보며, ‘저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 저걸 마시면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건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내가 렉스를 처음 마신 날, 헐크처럼 힘이 남아도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공복 운동은 제대로 집중하기가 어려워 나중엔 실내화 주머니를 걷어차며 털레털레 하교하는 초딩의 자세가 되곤 했는데, 남아도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던 나는 한 시간 가까이를 더 뛰었다. 탄산 없는 딸기 에이드 맛이 나는 렉스를 마시며 ‘인생에도 너 같은 녀석이 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녀석은 젖은 빨래 더미처럼 쭈욱 늘어져있는 내 어깻죽지에 두 팔을 넣어 ‘힘내!!!’라며 억지로 일으켜주는 친구 같았다.


"내 인생의 수많은 보조제들에게"

누구에게나 마음과 의지는 가득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순간이, 그리고 시절이 있다. 등을 마주 대고 선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 앞으로 걸어야 하는 거리만큼이나 머리와 마음의 거리가 멀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 마음은 이미 매트 위에서 땀을 한 바가지 흘린 채, ‘나란 녀석.. 오늘도 해냈어!’라며 뿌듯해하고 있는데, 내 몸은 아직도 옆구리를 숟가락으로 찔린 잘 익은 홍시처럼 침대 위를 흘러내릴 때가 있듯이 말이다. 이 험한 세상, 내 마음대로 되는 건 내 몸밖에 없다는데, 그걸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한다. 민망한 변명도 해보고, 자기 합리화도 해보지만 결국 남는 것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너무 완벽하려 한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양치하고, '스스로' 양말을 신고, '스스로' 잠드는 법을 몹시도 성실히 터득한 탓이다. 스스로 완벽하지 못한 자신에게 실망한다는 것은 우리가 꽤 많은 것을 스스로 해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한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리고 기꺼이 세상에 도움을 청할 때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다.


일과 사람에 치여 돌아보기 힘들었던 내 몸, 수 십 년 동안 담을 쌓고 살아왔던 운동, 어떤 근육을 써야 하는지 몰랐기에 자꾸 삐그덕거리는 손목 등. 나의 운동을 망설이게 하는 객관적인 요인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관성으로 인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그러니까 ‘다이어트는 무슨, 그냥 행복한 돼지로 살아!’라고 악마가 유혹할 때, 나는 미완의 나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보조제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무거운 몸뚱이를 일으켜 손바닥만 한 레깅스에 다리를 욱여넣고 매트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실패 바로 직전에 렉스의 도움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아주 작은 경험 덕분이었다.

도움이 필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때가 있다.

힘들 때마다 기꺼이 손을 내어준 내 인생의 수많은 보조제들을 떠올린다. 그것들로 인해 축적할 수 있었던 작은 성공의 경험들을 돌아본다. 그것들은 엄마의 얼굴, 아빠의 목소리, 친구들의 어깨와 같은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다. 때론 윤종신의 음악, 노희경의 드라마이기도 했다. 아, 음식들도 빼놓을 수 없다. 첫 시험을 망치고 책상 밑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던 나를 꺼내 준 엄마의 김치찌개, 전쟁 같은 다툼 이후 아빠가 화해의 의미로 사 온 붕어빵, 유학 중 남자친구에 차이고 친구들과 먹던 눈물의 빅맥 같은 것들. (음, 생각해보니 하나같이 고열량 고탄수화물이다. 다이어트를 평생 해야 한다는 게 조금 덜 억울하게 느껴진다.) 어쨌거나 크고 작은 도움의 손길들로 인해, 나를 억지로라도 일으켜주는 인생의 보조제들 덕분에 나는 포기 직전의 순간들을 무탈하게 넘길 수 있었다. 수렁에서 빠져나와 다음 시험을 열심히 준비했고, 아빠와는 평생 친구가 되었고, 곧 멋진 새 남자 친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몸은 생각보다 금방 낯선 것 익숙해진다."

 처음엔 렉스를 마시고 헐크에 빙의된 듯 한 시간씩 온 집안을 뛰어다녔으나, 약 한 달이 지나자 예전만큼의 괴력을 뿜어내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그렇다고 해서 렉스를 먹지 않은 날, 다시 ‘실내화 털레털레 초딩’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이에 체력과 근육이 늘어난 것이다! 렉스 없이 운동하더라도 예전보다 훨씬 덜 힘들고, 강한 자극을 느낄 수 있었다. 정해진 운동 시간이 지나고 나면 ‘충분히 힘들었다’고 느낄 정도로 기분 좋은 뿌듯함과 설렘이 밀려왔다. 이제는 정말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일어나기 어렵거나, 오늘처럼 과음한 다음날만 렉스를 먹는다. 나는 그렇게 강해진 것이다.

다이어트는 계속된다. 비록 3921번째 정체기가 찾아오더라도.

나는 이번에도 렉스의 도움으로 한차례의 정체기를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 와인도 퍼마시고 라면도 두 개씩 끓여먹은들 좀 어떠한가. 행복해지기 위해 다이어트하는 것이고, 나는 어제 충분히 행복했으므로 후회는 넣어두기로 한다. 다만 행복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약간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도 가끔 있다는 것에도 동의하기로 한다. '그래, 오늘은 오랜만에 네 힘 좀 빌리자’ 보틀 속에서 출렁거리는 오미자 빛 영롱한 물을 꿀꺽꿀꺽 한 입에 마신다. 팔 등으로 입을 쓰윽 닦고, 어깻죽지를 하늘로 쭈욱 쭈욱 편다. 승리가 확실한 전투를 앞둔 전사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매트로 향한다. FIN.



* 운동 보조제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 (중략) 그럴듯한 과학적 논리들을 앞세워 체지방을 쉽게 태워 없애준다든지, 같은 노력으로도 훨씬 큰 근육을 만들어준다는 선전 아래 수많은 종류의 제품이 시장에 소개되고 있어도, 정작 이들의 진정한 가치나 이들 제품의 옥석을 가릴 공신력 있는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의약품의 경우 용도에 딱 맞게 제품을 만드는 것이 생산자의 전적인 책임이라면, 보충제의 경우 정확한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상당 부분 소비자의 책임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출처 : 주간동아, “힘이 불끈” 운동 보조제 참을 수 없는 유혹(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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