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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래 Oct 16. 2020

아버님, 앞으로 등산은 혼자 가세요

좋아하서 하는 다이어트 대신 좋아서 하는 운동

“아버님, 앞으로 등산은 혼자 가세요!”

 결혼 5년 만에 시부모님과 떠난 첫 번째 여행지에서 며느리는 당돌하게 말했다. 제주도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섬 추자도 내 올레길을 산책하는 일정이었기에, 나는 글래디에이터 같은 굽 낮은 샌들에 깜찍한 점프슈트 차림이었다. 그것은 올레길이라면 숱하게 걸어봤다는 자만심이 불러낸 참사였다. 그곳은 말이 올레길이지, 극악무도한 등산길이었다.

조금 오버해서 체감은 약간 이 정도였습니다. 

  한 시간쯤 말없이 걸었을까. 올라도 올라도 끝나지 않는 계단, 자꾸 머리를 내리치는 나뭇가지, 자꾸 다리를 물어뜯는 벌레에 질려 땅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마라톤 4회 완주 경력 및 헤아릴 수 없는 등산 경험을 보유한 시아버지는 저만치 앞에서 나를 (비)웃고 계셨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버님!! 앞으로 등산은 혼자 가세요!”     


"등산, 대체 왜 하는 거죠?"

심지어 성수기에는 줄지어 오르는 진풍경이 연출되곤 한다. 대체 왜죠?!

 등산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평소 사근사근한 며느리마저 야누스의 두 얼굴로 만드는 운동. 시간당 최고 800kcal까지 소비가 가능한(50kg 성인 기준) 고효율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 계획에 한 번도 등산을 끼워 본 적은 없었다. 


 반대로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님을 따라 전국의 이 산, 저 산을 반강제로 따라다녀서인지 등산 DNA가 몸에 새겨져 있었고, 추자도 등산 이후 몸이 근질근질해 보였다. 그 후로 ‘그래도 제주도까지 왔는데 한라산은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도저히 이해 안 되는) 열망을 자주 내비쳤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러다 제주살이를 마무리하기 일주일 전, 그러니까 두 달 전보다 최소 5kg가 늘었다는 것을 (굳이 잴 필요 없이) 몸으로 느낄 무렵에야 못 이기는 척 비로소 그 열망을 실현시켜 주기로 했다.      


'등산을 할 바엔 런지를 2만 개 하겠어요'

나는 오직 앞만 본다. 왜나면 앞만 보기 때문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생에 첫 등산의 목적지가 무려 왕복 9시간짜리의 한라산 백록담이었다. 생에 처음인 만큼, 나는 나조차 몰랐던 나의 등산 습관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절대 주변을 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본다는 것이었다. 


 오직 내 앞의 계단만 보며 올라갔다. 오직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느낌에만 집중하며 ‘나는 지금 런지를 하고 있다, 한 걸음에 3kcal.. 6kcal... 풍경은 내려오면서 보면 돼. 일단 올라가자.’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시선을 돌려 산세를 감상할 여유도 의지도 없었다. 간만의 등산에 기분이 좋아진 듯한 남편이 뭐라 말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점심 뭐 먹었어요?’라고 묻는 팬에게 ‘아 진짜요?’라고 답하기도 한다는 팬사인회 속 지친 아이돌 가수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자기, 벌써 해발 800m야!"

"아 진짜?"

"자기, 방금 지나간 사람 연예인 맞지?"

"아 진짜?"

"자기, 좀만 더 가면 진달래대피소야"

"아 진짜?"

"알았어 앞으로 말 안 걸게!"

"아 진ㅉ.. 응?"

아진짜요? 아진짜요? 아진짜요? 아진짜요?


'이제 내려가면서 천천히 풍경을 감상... 하려 했으나'

 그렇게 4시간 동안 약 22,000개의 런지 끝에 오른 백록담에서 나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땅이 아닌 앞을 보았고, ‘이제 운동 다 했으니 내려가면서 천천히 풍경을 감상해야지’라고 생각했다. 


 끝없이 펼쳐진 기암절벽과 봉우리에 걸쳐있는 구름에 감탄하면서 ‘등산은 내려가는 재미로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한 지 5분 여가 지났을까, 갑자기 거짓말처럼 구름이 몰려오더니 폭우가 쏟아졌다. 


 일기예보만 믿고 우비도, 우산도, 모자도 가져오지 않은 우리는 그때부터 올라온 길을 뛰다시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비는 하산을 마칠 때까지, 그러니까 거의 4시간 내내 후두두둑 쏟아졌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라산에서 내 신발 앞코를 제외하곤 거의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내려와서 이틀 치의 근육통과 사흘 치의 오한 감기에 시달려야 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은 충분히 산세도 보고, 꽃도 보고 나무도 보고, 심지어 연예인(일지도 모르는 사람)도 봤는데. 내려오면서 봐야겠다고 다짐한 그 모든 것들은 희뿌연 구름에 모두 가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투덜거릴 새도 없이 비를 온몸으로 맞는 하산길에 ‘이것이 나의 마지막 하산’이 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다이어트라는 ‘의미’만을 생각하며 오르느라 찾아볼  여력이 없던 등산의 ‘재미’는 구름과 함께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등산의 의미, 등산의 재미"

나에게도 등산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었더라면

남편은 아버님을 따라 새벽 세 시부터 텐트와 코펠을 짊어지고 강제로 등산을 해야 했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진저리를 치곤 했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늘 즐거워 보였다. 


특히 ‘과천발(發) 대구행(行) 심야버스를 타고 당일치기 팔공산 등산 후, 막차를 타고 귀가한 썰’은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만큼 자주 들었지만, 그 얘기를 하는 남편의 표정은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를 할 때만큼 행복해보였다. 

당시 공무원이었던 아버님의 봉급은 네 식구에게 자가용과 숙소를 제공해주진 못했지만, 아들에게 짙은 농도의 추억과 화목한 기억을 선물하기엔 충분했던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등산에 대한 좋은 추억을 벗 삼아 어른이 되어서도 종종 산에 올랐으며, 그 덕분인지 오래 걷고, 높이 오르며, 멀리 보는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좋아서 하는 다이어트는 있을 수 없지만"

 그제야 나는 왜 나의 다이어트가 늘 실패하는지(혹은 어설픈 성공 후 본격적인 요요가 오는지)에 대한 조금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오직 다이어트를 위해 운동하려 했을 뿐, 운동 자체를 즐기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좋아서 하는 다이어트’는 있을 수 없으나, ‘좋아서 하는 운동’은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저 다이어트에 좋다는 운동만 찾아다녔다. 


 라인을 만들어준다는 필라테스, 균형을 잡아준다는 요가는  두 달을 연속으로 채우지 못하고 그만뒀다 등록했다를 반복했다. 초반에 재미를 붙였던 수영과 스피닝도 몸무게가 빠지는 속도가 더뎌지면 운동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엉망인 자세로 힘만 빼려(칼로리를 소비하려) 애썼다. 


 그러면 여지없이 근육 대신 혹사당한 관절이 아프다고 신호를 보냈고, 그로 인해 운동을 몇 달씩 쉬어줘야 했다.     


 수학을 잘하기 위해서 수학 선생님을 좋아하려는 노력은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서, 운동을 좋아해 보려는 혹은 좋아하는 운동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발 앞의 계단 대신 눈 앞의 나무를 보았더라면, 복식호흡을 하려 애쓰는 대신 싱긋한 풀내음을 맡았다면, 내 헉헉대는 숨소리 대신 남편의 수다에 귀 기울였다면, 내게 등산은 다이어트를 위한 훈련이 아니라 여행이 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려오는 길에 비가 퍼부어도, 그것조차 즐거운 낭만이라 여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을 수도 있다. 오르는 동안 충분히 행복했으므로. 그저 즐거운 여행을 했을 뿐인데, 목표했던 다이어트까지 된다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있는가, 목표로 가는 과정이 즐거울 수 있다니!


‘살 빼야 돼서 운동해’ VS ‘운동하다 보니 살이 빠졌어’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목표가 갖는 의미에 집중하거나, 목표로 가는 과정에서 재미를 찾거나, 혹은 여러 가지 방법을 균형감 있게 유지하거나. 


 서핑이 재밌어서 근육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근육을 키우기 위해 주짓수를 배웠는데, 어쩌다 보니 주짓수에도 빠져버린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삶의 목표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해야 하는 것이 생기고, 해야 하는 것을 하다 보니 그것마저 하고 싶은 것이 되어버린 셈이다. 


 의미 없이 좇는 재미는 공허하고, 재미없이 좇는 의미는 강박이 되기 쉽다. 그동안 의미에 대한 강박으로 놓치고 있던 재미, 나는 그것을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살다 보니 운동이 재밌는 날이 오네요"

아가,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남편이 갖고 있는 ‘등산에 대한 유년시절의 즐거운 기억’ 같은 재미는 이제와 어디 가서 구할 수 없다. 고로 나는 이제부터라도 내가 좋아하는 운동이 무엇인지, '운동 그 자체가 주는 재미'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어쩌면 그게 등산이 될지도 모르니, 우선 이번 주말에 동네 뒷산이라도 올라봐야겠다. 이 소식을 듣는다면 시아버지가 아주 기뻐하실 것 같다. 


또 모르는 일 아닌가, 등산 보이콧을 선언한 며느리가 다시 본래의 착한 얼굴을 드러내며 “아버님, 앞으로 등산 같이 가요!!”라고 말하는 날이 올지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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