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그는 손수 간판을 달았다. '미래헌책방'. 이 가게가 자신의 평생이 될 줄 알았다. 그날 밤, 아내는 "당신 정말 책만 보고 살 거예요?"라며 한숨을 쉬었지만,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책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스며든 이야기였으니까.
처음 문을 열던 날, 책 냄새가 골목에 퍼져 나갔다. 종이와 잉크가 만들어내는 그 특유의 향은 마치 오래된 기억을 깨우는 향수 같았다. 헌책방이라 해도 책들은 보물 같았다. 고등학생이 참고서를 찾아 헤매고, 대학생이 절판된 전공서를 들춰보고, 동네 노인이 손때 묻은 시집을 집어 드는 모습. 그렇게 하루가 가득 찼다. 그는 책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기억하려 노력했다. 어떤 책은 누군가의 이혼 후 정리에서 어떤 책은 이사를 앞둔 집에서 또 어떤 책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왔다.
초기 몇 년간은 매일이 설렘의 연속이었다. 새로 들어온 책들을 정리하면서 그는 종종 시간을 잊었다. 1970년대 초판 문학전집, 손글씨로 메모가 빼곡한 철학서, 연애편지가 끼워진 시집. 각각의 책에는 전 주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헌책의 진정한 가치라고 그는 믿었다. 아내는 "당신은 책 장사가 아니라 책 수집가 같다"며 웃곤 했지만 그 웃음 속에는 남편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전성기는 분명 있었다. IMF 시절, 사람들은 새 책 살 돈이 없어 헌책방을 찾았다. 당시 그는 매일 새벽까지 책을 정리했다. 손목이 아파도 허리가 결려도 멈출 수 없었다. 손님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는 일이야말로 그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덕분에 자식들을 공부시킬 수 있었고, 삶의 희망도 붙들 수 있었다. "사장님 덕분에 애가 책 읽는 습관이 생겼어요."라는 부모들의 말은 그의 자부심이자 보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책을 파는 게 아니라 지식을 나누고,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 시절 단골손님들이 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찾아오는 중학생 민수는 판타지 소설에 빠져 있었고, 그는 아이를 위해 새로 들어온 판타지 소설을 따로 보관해두곤 했다. 대학원생 영희는 불문학 전공서를 찾아 헤맸고, 그는 헌책 시장을 뒤져서라도 아이가 원하는 책을 구해주었다. 퇴직한 김 선생님은 매일 오후 두 시면 어김없이 나타나 신문을 읽고 가셨고, 그는 선생님을 위해 항상 의자 하나를 비워두었다.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에게는 가족 같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이 보급되고 온라인 서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헌책의 특별함은 인터넷으로 대체될 수 없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젊은 손님들의 발걸음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올게요"라고 말하며 떠나는 손님들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형 체인점이 들어서며 골목 헌책방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30년 지기 헌책방 사장들이 하나씩 문을 닫고 다른 일을 찾아 나섰다. 그들과 함께 나누던 책 이야기, 손님 자랑, 힘든 하소연들이 그리워졌다.
마지막 타격은 알라딘 중고서점이었다. '중고'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사실상 새 책들이 판을 치는 매장이었다. 깔끔한 인테리어, 체계적인 분류, 바코드 시스템. 모든 것이 그의 헌책방과는 달랐다. 사람들은 깨끗한 책만 골라갔다. 누군가의 밑줄, 접힌 모서리, 이름이 적힌 표지는 '하자'로 취급됐다. 그가 사랑하던 '헌책'의 가치는 더 이상 인정받지 못했다. 손때 묻은 책의 따뜻함, 전 주인의 흔적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그런 것들은 이제 불편함으로만 여겨졌다.
손님은 줄었고 책은 쌓였다. 먼지 쌓인 책더미 사이에서 그는 종종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전기료, 임대료, 생활비. 현실은 냉혹했다. 아내는 "이제 그만두는 게 어때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그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이곳은 단순한 가게가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였으니까. 헌책방 불빛은 늘 어둑했고, 거리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간혹 찾아오는 이들은 기적 같았다. 어떤 여학생은 "이 시집, 저희 엄마가 대학 시절 읽던 책이에요"라며 눈을 반짝였고, 한 노인은 "이 책 덕분에 군 시절을 버텼다"며 책장을 어루만졌다. 그런 순간들이 그를 버티게 했다. 하지만 그런 손님만으로는 전기세조차 내기 힘들었다. 카드 단말기조차 없던 그의 가게에서 현금 거래를 불편해하는 손님들이 늘어났다. 젊은 손님들은 "카드 안 되세요?"라고 물으며 아쉬워하다가 결국 손빈 채로 나갔다.
폐업을 결심한 건 올여름이었다. 에어컨도 없는 가게에서 혼자 땀을 흘리며 앉아 있는데, 고물상 아저씨가 다녀갔다.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지만, 무심하게 말했다.
"사장님, 어차피 안 팔릴 책들 그냥 폐지로 넘기세요. 지금 시세가 이 정도 됩니다."
그 순간 그는 숨이 막혔다. 사람의 삶과 이야기가 묻은 책들이 무게로만 값이 매겨진다니. 30년간 정성껏 모은 책들이 누군가의 청춘이 담긴 책들이 폐지로 전락한다는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감상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몇 천 권의 책이 트럭에 실려 나갔다. 그는 차마 그 광경을 지켜볼 수 없어 뒷골목으로 피했다. 30년간 함께했던 책들과의 이별이었다. 차가 떠난 뒤 책방 안은 텅 비었다. 책장이 벽을 향해 허무하게 벌거벗겨진 채로 남았다. 책이 없는 책장만큼 서글픈 것이 또 있을까. 그는 빈 책장을 바라보며 지난 30년을 되돌아봤다. 웃음도 있었고, 눈물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고, 절망도 있었다.
마지막 날, 서가 한쪽에 책 한 권이 남아 있었다. 표지마저 바랜 수필집. 누가 일부러 남겨둔 듯 보였다. 『나의 문학 산책』이라는 제목이 가까스로 읽혔다. 그는 조심스레 들춰보았다. 페이지 사이에는 오래전 누군가가 남긴 메모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 책은 내 청춘의 기록이다. 2003년 봄, 대학 4학년.' 아마도 졸업을 앞두고 책을 정리하며 남긴 메모인 듯했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것이야말로 헌책의 진정한 가치가 아닌가. 새 책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전 주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흔적.
그런데 그때, 마지막 손님이 들어왔다. 3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책방을 둘러보더니 그 수필집을 발견했다. 그 책을 집어 들며 물었다.
"이거, 가져가도 되죠?"
멈추라고, 그건 두고 가라고, 외치고 싶었다. 마지막 남은 책이었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이었으니까. 그러나 결국 그는 미소를 지으며 책을 내줬다. 그것이 책방 주인으로서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 책이 떠나는 순간 진짜로 끝났음을 실감했다. 30년 헌책방의 역사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문을 잠근 뒤, 골목을 걸어 나오는데 맞은편에서 불빛이 번졌다. 고수포차였다.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가게였지만 오늘따라 그 따뜻한 불빛이 위로가 되었다. 낡은 천막을 젖히고 들어서니 소주 냄새와 따끈한 국물 냄새가 섞여 코끝을 찔렀다. 몇 개의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 저마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장이 반겼다.
그는 구석자리에 앉아 잔을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주가 쓰고 뜨거웠다. 30년을 마감하는 술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씁쓸했다. 옆자리에서 술잔을 부딪히던 중년 남자가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걸었다.
"오늘 무슨 일 있으신가 봐요. 얼굴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30년 지킨 헌책방 오늘 문 닫았습니다."
포차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소주잔을 내려놓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렸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동정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젊은 교사가 말했다.
"저도 대학 때 그 헌책방에서 산 시집을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절판된 책이었는데 아니었으면 평생 못 읽었을 거예요. 정말 고마웠는데..."
그 말에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책방에 있던 얼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공부하던 학생들, 시집을 사가던 젊은 연인들, 신문을 챙겨가던 노인들. 그들 모두가 그의 인생에 소중한 의미였다.
다른 손님이 술잔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헌책방이 사라진 게 아니라, 헌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진 거겠지요."
그 말이 가슴을 후벼팠다. 맞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책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고, 그 속에서 헌책방은 설 자리를 잃었다. 효율성과 편의성이 우선되는 시대에 헌책방의 아날로그적 정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고수가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세상은 돌고 돕니다. 언젠가 또 책 냄새를 그리워하는 날이 올 겁니다. 오늘은 그냥 이 술이 위로가 되었으면 하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끝난 게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거겠죠."
그 말을 듣고 있던 젊은 남자가 말했다.
"사장님, 그 30년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헌책방의 역사,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이야기들. 분명 의미 있을 거예요."
그는 처음으로 그날 밤 진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도 있겠다. 30년간 만난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책들, 그 모든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차 밖으로 나오니 가을바람이 골목을 스쳤다. 꺼진 간판 불빛이 아직 눈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 다시 그 불빛을 찾아 올 거라는 희미한 희망이 그의 발걸음을 조금은 가볍게 했다. 헌책방은 사라졌지만, 헌책방이 품고 있던 이야기들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또 다른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 그는 문득 내일부터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30년 동안 책과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온 시간들이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헌책방의 마지막 불빛은 꺼졌지만 그의 마음속 불빛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