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위한 책을 선택하기 위해 서재에 들어갈 때마다 눈에 밟히는 책들이 몇 권씩 있다. ‘언젠간 저 책으로 독후감을 써야지. 조만간 다시 한번 읽어 봐야지.’ 막상 펼치니 예전에 많은 동감과 도움을 받은 기억이 떠오른다. 다음 페이지가 멀다 하고 밑줄 그어 놓은 문장들이 많다. 다시 만났구나. 반갑다.
나 홀로 있을 때 나 자신을 학대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다. 자기 자신을 작아지게 만드는 것이다.
상대방과 있으면 자신을 방어하고, 관계 우위를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반면에 우리는 자신을 쉬이 비판한다. 무가치감의 트랜스 (trance, 의식이 없고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통제력을 갖지 못하는 가수면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 일은 트랜스의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 수용이다. 근본적 수용은 마음 챙김 (mindfulness, 명확히 보는 것이다. 순간순간 경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의식의 특징이다.)의 경험과 자비 (우리가 지각한 것들과 부드럽고 호의적인 방식으로 관계하는 능력이다. 두려움이나 슬픔의 감정을 느꼈다면 이를 내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닌 어머니의 사랑과 같이 부드러움과 배려로 감사하는 것이다.)의 함양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자신의 가치를 느끼기 위해 자유로워지기 위해 혹은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물질적 풍요나 인생 중 오랜 기간의 여행을 꿈꿀 수도 있으나 이는 다시금 공허해지며 자기 자신을 완벽히 사랑할 때 무엇이든 더욱 온전해진다.
무가치감의 트랜스에 빠지는 길에는 주로 몇 가지가 있다. 탐탁지 않은 자신에 대한 불안정감을 시작으로.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시작으로. 외부세계를 판단하는 나의 모든 경향성을 시작으로. 조금 더 자세히 기술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끊임없이 자기 개선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실패를 무릅쓰기보단 뒤로 물러나 안전을 도모한다.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산다. 계속 일을 한다. 자신에 대한 최악의 비평가가 된다. 타인의 잘못에 초점을 둔다.
그럼 왜 자꾸 무가치감의 트랜스에 빠질까? 우리의 불완전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불완전함은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존재의 자연스러운 부분인데 말이다. 그러나 깨닫는 능력 또한 인간의 속성이다. 무가치감의 트랜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가장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무가치감의 트랜스를 거부하지 말고 의식하는 것이다. 어떻게 의식하란 말인가?
마음 챙김 능력을 기르는 불교수행은 ‘위빠사나’라고 부른다. jtbc ‘효리네 민박’이란 프로그램에서 이효리가 요가할 때 들어봤던 단어들과 비슷하게 들리는데, 위빠사나 명상 연습을 하는 방법은 책에 자세히 나와있다. (페이지 80)
하루 중 오랜 시간 동안 명상 연습만을 하고 있을 순 없다. 근본적 수용은 체념을 하자는 것도 아니며 우리 삶을 수동적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이를 대신해서 어떤 목표지향적인 행동을 할 때 잠시 멈추어보자. 하던 행동을 멈추고 편안하게 앉아 눈을 감고 시작해본다.
우선 천천히 심호흡을 몇 차례 하면서 온몸의 긴장을 몸 밖으로 함께 내보낸다. 이와 같이 잠깐씩 멈춤으로써 ‘멈춤’을 일상적 삶에 들여놓을 수 있다.
아이들에게 자주 잔소리를 하게 된다. 아이들을 올바르게 훈육하기 위해 잔소리를 시작했는데 내가 나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해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조절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잠깐 멈추어보자. 나 자신의 화를 대상으로 나 자신의 열기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며 잠시 멈추어보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찾는 것이다. 이런 마음과 자세라면 그제야 부드러운 자세와 목소리가 담긴 진정한 잔소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학교 이후 줄곧 생산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왔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면 자연적으로 생기는 욕구인지도 모른다. 내가 부적격하다는 두려움과 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욕구가 부추긴 것이다. 우리는 이런 욕구를 음식, 술, 약물 등의 즉각적인 쾌감으로 충족시키려고 한다. 이것들이 효과가 있다면 유쾌한 감각을 일시적으로 급증시켜 즉각적 만족감을 제공하거나 수치심과 두려움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은 반복되고 다시 쾌감이나 안도감을 주는 그 어떤 것에 의존하게 된다.
반대의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욕구하는 나를 나 자신의 최악의 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욕구하는 나 자신에게 잔인하고 몰인정한 메시지를 보낸다. 음식이나 휴식 혹은 다른 사람의 위로를 차단하는 식으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준다. 불안과 욕구의 감각은 불쾌한 것일 수 있지만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괴로움은 선택일 수 있다. 이럴 때 잠깐 멈추어 보자. 욕구의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멈추고 있는 동안 당신이 경험하는 것을 느껴보고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차리자.
무엇을 지각하든 “예스(Yes)”라 속삭이며 맞이한다. 기계적으로라도 마지못해 하는 예스라 해도 매번 예스를 하자. 외부적으로 과하다거나 옳지 않은 것에도 예스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럴 때는 강하게 “노(No)”를 해야 하지만 마음속 내면에서 일어나는 두려움, 분노, 상처의 경험에 대해서는 자비로써 예스라 말하고 받아들인다.
두려움은 우리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려주고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하게 해 준다. 두려움의 기본 기능은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다. 두려움의 정서는 개인사가 누적되어 형성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전혀 위험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 겁을 먹을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은 관계의 단절을 느낄 때, 즉 혼자 고립되었다고 느낄 때이다.
나에게도 나만의 다른 두려움이 있다. 주변 사람이 괴로움에 처해 있을 때 그가 나에게 고충을 풀어놓을 때 상대방을 낫게 하려고 애쓰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이야기든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행동이든 하겠다고 표현하는 내가 두렵다. 서로 마주 보면서 답답한 그 순간이 두렵다. 잠깐 멈추어야 할 때다. 그냥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냥 안아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 두려움의 트랜스가 일어날 때 걱정에 휘말리거나 일을 바로잡으려고 바쁘게 노력하는 대신 두려움을 만나는 것이다. 두려움에 주의를 기울이고 예스라고 속삭이며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은 것과 옳은 것도 내 것이지만 나쁜 것과 틀린 것도 내 것임을 깨닫는다. 사랑과 용서도 내 것이지만 자책과 후회도 내 것이다. 좋은 것과 옳은 것만 가질 수 없다. 동시에 나쁜 것과 틀린 것도 가져야 한다. 사랑과 용서만 하면서 살 수 없다. 자책과 후회도 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피하지 말고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