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훈의 글은 (특히 글이 시작되는 첫 부분에는) 몇 번이고 곱씹어 읽다가 '글을 이렇게까지 쓸 수 있구나!' 감탄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의 글쓰기를 모방하고 있다.
중국 작가 위화의 글은 읽기를 멈출 수가 없을 정도로 재미있다가 어느새 인간의 진솔함과 중국 근대문화를 체험하게 된다.
어느 특정 작가의 글이 좋아지게 되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어느새 나에게 숙제처럼 다가와 있다. '꼭 읽어봐야지'하고.
[일분만 더]는 하라다 마하의 두 번째 소설이다. 나에게도 [낙원의 캔버스] 이후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이다.
그녀의 글은 잔잔하다. 잔잔함에 무언가 진하게 우러나오는 뭉클거림이 있다. 잔잔함만 느낄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잊힐만하면 나타나는 우리 집 단골 토론거리가 있다.
'강아지를 키우자!' vs '강아지를 절대 키우면 안 된다!'
키우면 누가 키울 것이냐? 누가 매번 산책시킬 것이냐? 배변은 누가 치울 것이냐? 이담에 아플 땐 어떻게 할 거냐? 책을 읽고도 강아지를 키워야 할지 키우지 말아야 할지 명확하게 결정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강아지와 함께하는 삶을 알게 되었고 내가 모르는 또 다른 감정들이 있는 생활을 체험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강아지 산책이 쓸모없는 시간이라 치부되었지만 가미야 씨는 산책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기회를 찾았다. 아침에 이불속에서 꿀 같은 5분의 잠을 포기하고 아침 6시에 일어나는 것, 직장의 위치를 무시하고 출근 시간 다섯 배나 먼 곳으로 이사하는 것 모두 다 함께 살고 있는 골든 리트리버 '리라'를 산책시키기 위함이었으나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혜택을 찾았다.
냄새도 나고 시끄럽기도 하고 털도 많이 날리고 침도 정말 많이 흘리는 것은 알지만 리라와 같이 산다.
잡지사의 쉽지 않은 텐션 속에 리라와 함께하는 삶이 힘겹지만 나에게 따뜻한 이유는 무엇일까?
불구하고의 상황을 극복하고 애완견을 보살피는 것이 대단해서? 동물 애호가로서 사랑을 실천해서? 아마 아닐 것이다. 가미야 씨는 리라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위해 수고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기브 앤 테이크식 발상보다는 말은 못 해도 느낄 수 있는 리라의 사랑 때문일 것이다.
좋다고 안겨서 황금색 털을 옷에 더덕더덕 붙여 놓아도, 좋다고 얼굴을 핥아서 침범벅을 만들어도 퇴근하는 가미야 씨를 기다리느라 어쩔 수 없이 혼자 지내는 시간에 똥오줌도 참고 배고픈 것도 참아내는 리라의 사랑이 전달되어 그들의 삶이 따뜻하다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말 사람마다 다 다를까? 아님 사람은 모두 사람마다 다 비슷할까?
'알고 보면 사람은 다 비슷해' 혹은 '정말 나랑 생각이 다르구나. 사람은 정말 천차만별이야'라는 상반된 말을 하루에 얼마나 많이 되네이는지 모른다.
가미야 씨가 리라와의 삶을 지탱해 준 것은 주변 사람들이다. 자신과 비슷하다 생각했던 고스케 덕분에 편안했던 리라와의 삶을 보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나 할 줄 알았던 이별을 하고 고스케는 다른 사람처럼 떠났다.
'세상에 어쩜 저런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던 편집장은 여느 사람처럼 눈물을 글썽거렸다. 사람은 모두가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모두가 다르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변한다. 그래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겠지.
리라만이 변함없이 꼬리를 흔들며 우리를 맞아주고, 리라만이 세상에서 아무 가치 없는 하찮은 것들에 말을 걸어 주듯이 리라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리라는 키워지는 존재지만 우리 삶의 중심에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있다.
항상 펜을 들고 책을 읽는다. 밑줄 긋기 위해서.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바로 적기 위해서. 오직 한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나에게 울컥 포인트였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두 번째 읽었을 때에는 울컥거리지 않을 줄 알았다. 여지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그 포인트에선 누구든 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