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나 [데미안] 읽었는데’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그 한마디의 비유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 읽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나도 한마디로 비유하고도 싶다.
유년기 친구들끼리 떠벌리고 자랑하며 “하나님에게 맹세해!”라고 내뱉은 말과 지어낸 이야기 하나로 어린 주인공 싱클레어는 덩치 큰 크로머에게 약점을 잡힌다. 데미안은 크로머의 고통으로부터 싱클레어를 해방시켜준다. 우리가 성장해왔던 것처럼 죽을 듯 아팠던 고통은 어느 순간 시시해지고 사라지고, 새로운 아픔과 고통으로 우리는 항상 괴로워한다.
선과 악의 세계를 가늠할 수 있는 기회로 괴로움을 느끼기도 하며, 자신만의 체험을 쌓아간다.
그렇게 주인공 싱클레어는 고뇌하며 성장의 경험을 겪고 있다.
마음속 선과 악의 이야기.
우리 누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통념상 범죄나 악에 대해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좀 더 넓은 허용범위를 갖고 있다.
딱 그 허용범위의 차이만큼 우리는 담담해할 수 있으며, 선의 세계에 머무를 수 있다.
어른인 척할 수 있는 것이다.
허용범위를 벗어날 때에 각자가 그 결과를 감당하게 되며 무너지기도 한다. 하지 않던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죄를 짓게 될 수도 있다. 죄는 짓는 것은 쳇바퀴와 같아서 한번 저지르게 되면 반복하게 되는 법이다. 반복하면 무뎌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반복적으로 죄를 짓게 하는 저항할 수 없는 요인이 문제점인가,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나 자신이 문제인가.
무엇이 문제점인지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데미안에서 나는 사람 심리와 인간의 죄책감을 명확하게 글로써 읽을 수 있었다. 무언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들을 글로써 읽을 수 있는 기회는 소중한 것이다.
주인공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어떤 존재일까?
자신을 크로머로부터 구해준 좋은 동네형일까? 아님 제2의 크로머 같은 무서운 존재일까?
인간끼리 관계라는 것이 성립되면 상대방은 상황에 따라 밝은 존재가 되기도 하고 어두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의무감이 관계의 한 방향으로만 지워진다면 혹은 자각할 수 없지만 의식 아래 어딘가 의무감이 꿈틀대고 있다면 분명히 나를 도와준 존재인 데미안도 불편한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밝은 존재인지 어두운 존재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 것이다.
주변 사람으로부터 받는 영향력이란 대단하다. 성장기나 유년기에는 그 영향이 더욱 커진다.
싱클레어 주변에는 크로머, 데미안, 베아트리체 등 주변 사람이 바뀌면서 주인공의 생활 자체를 통째로 변화시킨다. 그중에 데미안은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친구이자 인도자이자 또한 자신과 동일시되는 존재인 듯하다.
데미안은 글 중 등장인물이지만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단어처럼 느껴진다. 고뇌라든지 사색이라든지 하는. 그래서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을 법도 하다. 데미안처럼. 데미안스럽다. 데미안적이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성장한다. 변화한다. 고통 없이 성장할 순 없다. 고통 없이 변화할 순 없다.
이 과정에서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고 누구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누구의 바람에 부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성장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나 데미안처럼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싱클레어만이 특이하게 그 과정을 겪는 것이 아닌 우리 누구나 데미안스러운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었다.
런던 홈스테이 시절에 같은 층을 사용했던 터키 친구 ‘엔다르’를 기억해냈다.
종교적인 이유로 맥주 대신 터키 차이를 마시며 자정이 넘도록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했던 그 시절을 기억해냈다. 이슬람교 이야기, 터키의 정치 이야기, 유럽 이야기, 당장 내 고민과 관련 없던 그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쩌면 내 문제들은 자연히 해결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행운을 바랐었다. ‘혹시 터키 친구 엔다르가 나에게 데미안 같은 존재가 아닐까’라고 밑도 끝도 없이 바랬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