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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Aug 03. 2019

인생 / 독후감48

위화 장편소설

 노름으로 선대 집안의 모든 재산을 말아먹은 사람이 잘했다고 할 수 있을까?

2 백묘 (현재로는 약 1만 5천 평정도)는 1 백묘가 되고, 1 백묘는 다섯 묘가 되고, 다섯 묘는 결국 없어져 같은 노름판에서 이긴 자의 소작인으로 전락한다.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기생집을 전전하면서 노름은 계속된다. 장인어른 미곡상 앞에서 기생 등에 업혀 장인어른께 인사를 드리는 인간이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인간이 인생을 회고하는 이야기가 소설 [인생]이다. 과연 들을만한 이야기일까?

작가 위화가 아니고서야 중국 근대의 문화혁명기 시절이 아니고서야 푸구이 노인이 하는 이야기는 무의미했을 것이다.

 한 권의 소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닫게 되면 ‘사람의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내 인생은 어떤 걸까? 별반 다르지 않은 걸까?’ 지금의 내 인생이 감사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삶에 대해 멍해지는 기회를 갖는다.


 현재의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때로는 너무나 비참하게 묘사하는 덕분에 읽는 페이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지만 시간은 또다시 흘러 다른 상황을 만들고 주변인들과의 관계도 변하는 것이 인생과도 같다.

작가 위화의 글쓰기는 인생과도 같다.

 예전에 죽을 만큼 힘들었던 그 일들은 시간 흐름을 밑에 깔고,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살아간다.

아내도 죽고, 딸도 죽고, 아들도 죽고, 사위도 죽었다. 손자마저 죽었다.

 각각의 죽음에 대한 각각의 슬픔으로 가족 모두가 죽은 지금에 푸구이 노인은 늙은 소 푸구이와 인생을 살아간다. 사는 것 자체가 벌 받는 것일까? 생각될 정도이지만 살아간다.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한 노인은 소 한 마리와 밭을 갈고 있다.

소의 걸음이 느려지자 노인은 이내 다시 고함을 지른다. “얼시! 유칭! 게으름 피워선 안 돼. 자전! 펑샤! 잘하는구나. 쿠건! 너도 잘한다.” 사실 소의 이름은 푸구이다. 푸구이 노인과 이름이 같다.

노인은 소에게 밭을 신나게 갈게 하고 경쟁을 시키기 위해 이름을 여러 개 불러서 속이고 있는 중이다.

 한창 책을 읽다가 다시 앞부분으로 돌아와 보니 노인이 부르는 이름들은 자신의 인생에 있었던 가족들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녹이며 부르는 이름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부르고 있지만 모두가 죽어버려 함부로 부르기도 쉽지 않은 이름들이다.

여름 내내 소와 함께 밭을 갈며 일을 할 것이고 일을 할 동안에는 자신의 인생을 녹이며 가족들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가족은 구성되지만 어릴 적 나는 손자였고, 조금 커서는 아들이었고 지금은 아버지와 동시에 여전히 아들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역할이 바뀌면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도 각자의 역할과 경험으로 [인생] 이야기에 동감한다.

노름과 아내에게 몹쓸 짓을 하는 푸구이를 보며 한숨과 욕이 나왔지만, 자식들과 손자까지 잃은 아버지 푸구이, 할아버지 푸구이를 보며 그를 동정했다.

시대를 빗댄 작가 위화의 날 것의 표현을 감당할 길 없이 슬프기만 하다. 아들을 잃은 슬픔, 아버지로서 감당해야만 하는 슬픔, 아내에게 말하지 못하는 슬픔 그리고, 불효자로서 손자를 부모의 묘 앞에 묻고 부탁해야 하는 슬픔. 무엇 하나 제자리인 것이 없는 듯하다.

그가 만들어 내는 이 슬픔이 심해서 그는 이것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동시에 그는 마음에 얼마만큼의 슬픔을 담고 있기 이런 슬픔을 만들어낼까 라는 생각도 든다.




글을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인생이 꼭 슬픔인 것만 같지만 소설 [인생]에는 기쁨도 있었다.

인생에는 기쁨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다만 위화는 인생의 차고 넘치는 행복 중에 슬픔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원래 인생은 행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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