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정신과의사(6)
동물농장
지금의 레지던트 과정에 오기 20년 전쯤 나는 미국생활을 막 시작한 이민자였다. 모든 게 새롭고 모든 게 낯설고 그리고 모든 게 힘들 수밖에 없는. 심지어, 그 당시 발급받은 영주권 앞에는 "Alien Registration Card"라고 쓰여있었다 (지금은 Permanent resident card라고 조금은 톤 다운된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아무튼 "Alien" 이 단어만 보면 거의 외계인 취급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Alien이라는 외계생명체를 다룬 호러 무비가 유명세를 탈 때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암튼, 그때 유일한 낙이라곤 하루종일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작은 천체망원경을 들고 집 근처 산에 올라가서 별을 보는 것. 별을 보면서 외로운 나 자신을 위로하고 한국에 있는 한 소녀를 그리워하고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했었다.
그렇게 난 학교에 갈 생각은커녕 몇 년간 아르바이트로 전전했다. 동네 편의점에서 빈 선반을 채우고 유리창을 닦고 하루의 매출을 기록하고 정리하고 마감까지 열심히 했다. 좀 심하다 싶도록 선반의 제품이 가지런히 놓이게 배치하고, 하나라도 비뚤어지면 바로 놓아야 마음이 편해졌다. 유통기한이 지난 상품들을 꼼꼼히 뒤져 폐기처리하고 하루 마감땐 1전이라도 차이 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나에게 잠재되어 있는 적당한 강박적인 성격이 한몫을 한 게 아닐까. 그렇게 보면, 예전 CEP에서 나와 인터뷰를 했던 데이비드와 적어도 하나의 연결 고리는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단순 노동이었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문제는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영어 실력. 손님 중엔 영어도 못하면서 어떻게 여기서 일을 하냐고 짜증을 내는 손님이 적지 않았고, 영어를 배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때가 나의 인생에서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내가 일하던 세븐일레븐에서 집으로 가는 길 옆에 작은 대학교가 하나 있었다. 배우고 싶으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 우리나라 말로 말하면 전문대 느낌. 조금 무서웠지만 맘을 먹고 English 101 수업에 등록을 했다. "뭐 일단 시작해 보자"라는 맘으로.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을 하고 아침 7시에 퇴근을 해 곧장 수업을 받으러 가면. 어마어마한 피곤함이 몰려와 거의 수업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한심하다는 듯 날 보며 물으셨다. 왜 그렇게 잠만 자는지. 난 사실을 그대로 얘기했고 교수님께서는 말없이 잠깐 생각을 하시더니 수업 끝나고 본인의 오피스로 찾아오라고 하셨다.
교수님에게는 한 시간 수업이 더 남아 있었고 그래서 난 교내 맥도널드에서 프랜치 프라이를 하나 사와 햇볕 가득한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다람쥐와 나눠 먹었다. 시간이 돼서 교수님의 오피스에 찾아갔더니 교수님은 날 반갑게 맞아 주셨다. 내심 혼낼 줄 알았는데 다행… 교수님께서는 내가 궁금하셨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셨고 내가 갓 이민온 이민자라는 것을 깨닫으시고 부모님 얘기를 해주셨다. 교수님의 부모님도 폴란드에서 이민오셔서 힘들게 미국 생활에 적응을 하셨고 영어 때문에 많이 고생하셨다고.
그리고는 책상 서랍에서 책 하나를 꺼내 드시곤
"This is going to be your final test.”
난 이해가 안 가서 물었다
"excuse me? final test?”
교수님께서는
"난 네가 수업 시간에 잠을 자든 뭘 하든 뭐라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번 학기에 이 책을 다 읽고 책에 대한 너의 감상을 내게 얘기해 주렴."
교수님이 건네주신 것은 '동물농장'이라는 책이었는데, 그 책은 손바닥 크기만큼 작고 얇아서 "이것쯤이야" 생각하고 바로 교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으로 대하는 원서였지만 보기엔 동화책 같아 나름 후딱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은 난 한국에서도 영포자였기에 원서를 읽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수업 시간에 자유롭게 잘 수 있다는 말에 바로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한 학기 동안 한 7번은 읽었을까 아무리 읽어도 절반조차 이해가 안 가고 사전을 찾아봐도 너무 어려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단어들이 은유적으로 가득했던 이 책. 결국 교수님과 다시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왔고 난 어설픈 영어 실력으로 버벅버벅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아는 최대한의 감상평을 말했다. 발표를 마치고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패스만 해도 성공이겠다...'
하지만 교수님의 반응은 내 생각과 사뭇 달랐다.
"You did a great job. I must give you an A.”
분명 이건 A 감이 아닌데. 왜 이러실까? Trick 인가? 생각했지만.
교수님은 그 책을 그냥 가지라며 말씀하셨다.
“This book is for you. Be proud of yourself, you finished this book, your first English book.”
이 격려의 말씀을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교수님의 그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고, 다 이해는 못 했지만 한 권을 내 힘으로 끝냈다는 것에 얼마나 자신감이 솟아올랐는지 모른다. 그 후부턴 난 뒷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의 책을 항상 가지고 다니며 읽었다.
책이 재미있어서 읽었다기보다 읽는 것 자체가 좋았다. 뭔가 새로운 언어가 번역 없이 술술 나의 뇌에 박혀 이해가 되는 느낌이 좋았다. 마트에 가서 계산대 줄을 설 때, 버스와 지하철에서, 아르바이트하다 쉴 때도… 공부에 관심 없던 아이가 독서가 취미가 되기 시작했다. 외로운 이민자 청년에게 할 일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아직도 내 방 서재에는 그 책이 있다 - Animal Farm by George Orwell.
이 책이 아니었으면 아니 그 교수님의 응원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도 않겠거니와 나의 선생님이 될 수많은 환자들과도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십여 년 전 그분의 따님께서 이메일을 보내주셨다. 교수님이 소천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때부터 난 이 책을 내 책상 가까이에 두고 그분을 생각하곤 한다. 학생들의 속사정을 충분히 들어주시고 이해해 주신 그분의 배려심과 이해심이 한 어린 학생의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되었다는 걸 알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