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정신과의사(1)
고마워요 닥터 세이어
그 2번째 영화의 제목은 Awakenings (한글명: 사랑의 기적)이다. 장르는 드라마. 게다가 주연이 로버트 드니로와 로빈 윌리엄스였다. 내가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지인이 추천해 준 영화.
영화 '사랑의 기적'(한글명) 포스터
나름 연기파 배우들의 명작인 것 같았지만 최신 영화도 아니고 내 스타일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다지 볼 마음은 없었는데. 일단 집으로 가져와 며칠을 책상 위에 던져 놓고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토요일 아침, 침대에서 뒹굴다 문득 고개를 드니 저기 책상 위에 그 DVD가 보였다. 그래도 내용이라도 조금은 알아야 그 영화를 봤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해서, player에 DVD를 넣고 상영을 시작했다.
2시간의 순삭. 정말 말 그대로 사라져 버린 2시간.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영화에 빠져 주인공으로 빙의해 주인공의 감정들을 아주 자세히 느껴본 것이 얼마만인가, 아마도 그 옛날의 6살 꼬마일 때 보았던 영화 E.T. 이후 처음이었던 것 같다.
영화 사랑의 기적의 한 장면 내가 완벽히 감정이입하게 된 캐릭터는 로빈윌리엄스가 연기한 닥터 세이어. 그 옛날 딱히 치료방법이 없던 기면성 뇌염*에 걸린 로버트 드니로(극 중 레너드)를 치료하는 과정이 영화에서 정말 처절하게 묘사가 되었고, 또한 환자 역을 맡은 로버트 드니로의 수준 높은 연기력에 순식간에 빠져들어 버렸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조용히 요동치고 있던 삶의 방향에 대한 질문들이 어느 정도는 미묘한 설렘으로 이 영화를 통해 해소될 수 있었다.
*기면성 뇌염(encephalitis lethargica)은 뇌염(뇌의 염증)의 한 종류로 1917년 처음 발견됐다. 이 병은 뇌의 언어와 운동영역을 공격하여 사람을 조각상처럼 만들 수 도 있는 병이었다. 특히 1915년과 1926년에 전 세계적으로 퍼져 약 500만 명 이상이 영향을 받았고, 그중 3분의 1 정도가 급성단계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로버트 드니로는 어릴 적 이병에 걸려 중년이 될 때까지 몸이 돌처럼 굳어 있었지만 닥터세이어 덕분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기적을 경험하는 인물로 나온다. 참고로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릿속에서 전쟁이 벌어졌던 그때. 사춘기 후 다시 찾아온 이 질풍노도의 시기에 본 이 영화는 뭔가 닥터 세이어가 겪고 있는 내면의 고뇌마저 부럽게 느껴졌다. 이 영화에서 닥터 세이어는 굉장히 조용하고 대인기피증까지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맡은 환자들을 위해 몸을 던지고 모험까지 마다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달리게 했을까. 정말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이날 이후 난 기면성 뇌염이라는 병에 심취하여 혼자서 공부하기 시작했고 의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왠지 긴장증(catatonia)에 걸린 사람처럼 움직임이 극도로 감소하거나 몸이 비정상적인 상태로 뻣뻣하게 유지되는 , 그리고 특히 무반응상태에 빠져 자유의지가 철저히 결여된 증상들의 병리생태가 너무도 궁금했다. 저렇게 뻣뻣해진 몸속 그들의 의식은 이 바깥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 이런 궁금증들은 이제는 일반인을 상대로 출판된 책 속에서는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업게 되었다. 그때였던가... 이젠 제대로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물론 예전부터 진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지만 이 영화들로 인해 난 내 삶의 중력을 벗어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추진력을 얻은 것 같았다. 내가 쌓아온 커리어, 울타리, 안정적인 삶. 이런 것들을 뒤로하고 닥터 세이어와 같이 열정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너무도 쟁취하고 싶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ignition, 점화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도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한 달 후 난 사직서를 가지고 클라라를 찾아갔고 클라라는 나에게
"네 나이를 생각해 봐, 지금 30대 중반에 다른 일을 시작하려고? 의대에 합격한 것도 아니고 의대 시험을 준비하러 다시 학부로?"
클라라는 나의 결정이 다 자기가 빌려준 DVD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나의 결정을 말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라는 생각에 난 사직서를 정중히 전달했고 클라라도 이해해 주었다.
사직서를 낸 지 2주 후 난 큰 트럭을 빌려 짐을 싣고 새로운 삶을 위해 뉴저지로 12시간의 대장정을 떠나게 되었다.
떠나는 날 회사에 잠깐 들러 클라라에게 인사를 하려는데 클라라가 책 한 권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짧은 설명과 함께 동물들의 모습이 그려진 책인데. 마지막 장을 넘겨보니 사자 한 마리가 좁은 계곡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점프하려고 돋음 질을 하는 장면이 있는 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 사진 아래에 클라라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는데...
"You can't cross the chasm with small jumps, but take one giant leap. Do not come back!"
(작은 점프로는 계곡을 건널 수 없다. 하나의 큰 도약을 해야지. 돌아오지 마세요!)
내가 내린 결정이 옮은 결정인지 하루에도 수십 번 고뇌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클라라의 이 메시지가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마음을 먹었으면 한 번의 큰 점프로 끝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트럭의 엔진을 켰다. 자 Let's begin!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난 맨해튼의 어느 작은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공부만 하기엔 그간 회사를 다니며 저축해 놓은 돈을 다 탕진해 버려 어쩔 수 없이 공부와 일을 병행해야만 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계단에 앉아 도시락을 꺼내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Congratulation. You have been accepted to our medical school..."
나의 모교가 될 의대의 학장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신 것이다. 그 순간 지난 2-3년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학장님께서는 내 마음을 다 아시는 듯 웃으시며 괜찮다며 학교에서 보자고 하셨다.
먹던 도시락을 끝내지 못하고 뚜껑을 닫고 만감이 교차하는 뭉클함을 잠시 느끼며 앉아 있었다. 그 시간과 공간 그 공기의 냄새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 후 거의 7~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는 지금 이곳 응급정신센터에서 이런 지난 일들을 주절이 주절이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내 차례가 오기 전에 또 병동엔 사건이 터졌고 내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말았다.
퇴근하기 전 환자차트를 정리하다 긴장형 조현증으로 진단받은 환자가 병동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면성 뇌염과 증상이 사뭇 비슷한 병인지라 문득 Awakenings 영화에서 나온 환자들이 떠올랐다. 그 환자분을 만나러 가보니, 어두운 방 안에서 창밖을 물끄러미 보며 앉아 계셨다. 환자의 이름을 부를 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다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으로 고개를 돌려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의 호기심을 충족하는듯해 보였다. 왠지 순간 닥터 세이어가 된 기분이었다. 물리적으로 이렇게 서로 가깝게 있지만 내가 닿고 싶은 환자의 의식은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그런 가슴 아픈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 영화의 배경이 된 시간과 현재와의 다른 점은 다행히도 새로운 치료법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난 교수님께 노티를 하고 가능한 한 빨리 긴장증에 반응이 좋은 약물을 투여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의 질병은 언뜻 봐서는 바깥세상과 벽을 쌓은 것 같은 증상이어서 주변 사람들이 말조차 걸어주지 않지만, 난 한 가지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이름을 불렀을 때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 것처럼 주위를 인지하지만 어떤 신경학적인 제약으로 표현을 못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그래서 가능하면 대화가 되지 않아도 다른 환자를 대하듯 말을 많이 하고 싶었다. 한 명만 말을 한다고 대화가 성립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흘러 오전 7시가 되었고 난 오랜만에 금요일을 낀 온전한 주말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집에 와서 잠깐 눈을 붙이고 점심에 예전 학교 동기들과 브런치를 먹을 계획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 난 8 아베뉴를 따라 걷고 있었다. Port Autority bus terminal (고속터미널)을 막 지나고 있을 때 친구에게 문자하나가 왔다.
"네 롤모델인 로빈윌리엄스가 오늘 자살을 했데. 목을 맸다고..."
그 문자를 읽는 순간 떠오르는 '닥터 세이어'.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었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은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항상 웃는 얼굴로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던 사람이 우울증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시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그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서 그 누군가가 알아봐 주었다면... 물어봐 주었다면...
몇 년 후, 난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얻었다. 전문의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고마워요, 닥터 세이어"
난 힘이 들거나 지칠 때 영화 속 로빈윌리엄스(닥터 세이어)와 로버트 드니로(레너드)와의 대화를 떠오르곤 한다. 영화 속에서 세이어 박사가 파킨슨병 환자를 위해 개발된 신약(L-DOPA)을 레너드에게 시험해 보는데. 잠깐이지만 기적이 일어난다. 몇십 년 동안 굳어져 조각상과 다름없던 그가 정상인처럼 말하고 움직이고... 그때 그들이 나눈 대화이다.
"이제 뭘 하고 싶죠 레너드?"
"아주 단순한 거요. 산책 같은 거요. 내가 원할 때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병원을 나가면 뭘 할 건가요?"
"걷고, 보고, 사람들과 대화를 할 겁니다. 이쪽으로 갈지, 저쪽으로 갈지, 아니면 똑바로 갈지 정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할 겁니다."
"그게 다예요?"
"네, 그게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