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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YOU Oct 27. 2024

Work Sucks

맨해튼 정신과의사(9)

Work Sucks




어느 금요일 새벽,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환자는 IN으로 결론이 났다. 시계를 보니 바늘은 아침 6시쯤을 가리키고 있고 오늘도 응급실 수용인원이 꽉 차버렸다. 다음 시프트 시작까지 한 시간 정도가 비어 있었는데,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달렸던 터라 다들 매우 허기가 진 상태였다.


"야식이나 먹을까요?"


스태프 중 한 명이 먼저 싸 온 음식을 풀어놓자 모두들 하나씩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했다. 같이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는데, 어쩌다 보니 한 사람씩 돌아가며 어떻게 하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각자의 인생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한 명은 내과 간호사로 20년을 넘게 일했는데, 내과 병동에서 정신질환 환자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마음이 아픈 환자들을 보살피는 방법을 더 자세히 배우고 싶어서 정신과로 왔다고 했다. 한 명은 일반 회사에 다녔는데, 우울증에 걸린 동생을 보살피다 보니 자연스레 정신건강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4년 만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해 첫 직장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같이 일하던 레지던트 4년 차 선배는 이력이 정말 특이했는데, 의대를 시작했을 때 나이가 40대 중반이었고 레지던트를 시작할 때엔 50살이 다 되었다고 했다. 더 놀라운 건 한국과 인연이 있었는데. 예전엔 미국 공군 파일럿이었고 초음속 초고도 정찰기를 몰고 한반도 상공을 날며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고 했다. 그녀의 꿈은 조그만 중고 비행기를 사서 엠뷸런스로 개조를 한 뒤 병원 접근성이 떨어지는 외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참고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를 보고 깨달았는데. 그녀는 병원 내 모든 레지던트를 통틀어 성적이 탑을 찍었다.)


이렇게 동료들의 스토리를 듣고 있자니 정말 나의 스토리는 다소 진부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이곳까지 오게 된 뚜렷한 목표와 방향이 있었는데,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좀 창피했다고 해야 할까? 왜냐면 아마도 누가 나에게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됐나요라고 물어보면... '두 영화'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서 의학 쪽으로의 커리어 체인지가 두 영화 때문이라고 한다면 솔직히 너무 즉흥적인 결정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영화들이 내가 커리어 체인지를 하는데 확실히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때는 2000년대 후반, 난 Michigan의 Ann Arbor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이 작은 도시는 학교를 중심으로 발달한 일종의 캠퍼스 타운이다. 얼마 전까지 거기서 대학교를 다니다 졸업과 동시에 운 좋게도 근처에 있는 회사에 바로 취직이 되어 그냥 눌러앉게 되었다. 졸업하기도 전에 대기업에 취직이 된 것에 대해 내 친구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운이 좀 좋았다고 생각한다. 


졸업을 할 때쯤 되면 여러 기업들이 학교에 방문해 기업설명회를 하는데, 그때 난 성적도 상위권이 아니었고 대기업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과 어느 강의실을 지나가는데 'Free Pizza'라고 쓰인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친구들은 시간 낭비라며 그냥 지나갔지만. 난 어차피 되던 안되던 피자는 하나 먹고 나올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어 강의실로 들어갔다. 벌써 설명회는 시작을 했고 뒷좌석은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남아 있는 피자 몇 조각이 맨 앞 줄에 있었는데 난 피자를 먹고자 하는 본능을 따라 휑하니 비어 있는 앞줄로 향했고 나이가 좀 있어 보이시는 아주머니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료수가 반대편 쪽에 있어 손이 닿지를 않아 옆에 앉아 계신 그분께 음료수 좀 전달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분은 "Sure" 라며 음료수를 잔뜩 가지고 와서 내 앞에 놓아주셨다. 그렇게 게걸스럽게 피자와 음료수를 먹느라 기업 설명회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옆에 앉아 계신 그분께서 계속 이런저런 질문을 해 오셨다. 프로그래밍 경험이 있는지, 언제 졸업하는지 등등... 난 그때 그녀가 미래의 내 보스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만일 내가 그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지금의 인생과 많이 달라졌을까? 나는 배가 고팠고, 때마침 free pizz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고, 내가 앉을 수 있는 빈자리는 미래의 내 보스 옆뿐이었는데. 난 내심 과학적인 사람이지만 어쩔 땐 이런 사건의 연속성은 뒤를 돌아 생각해 보면 뭔가 순수하게 랜덤 한 이벤트 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것이 랜덤 하던 아니던 그곳에 문을 열고 들어간 내 의지가 이 연속성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트리거 임에는 틀림없다. 두드리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갈 인생의 수많은 이벤트들을 가능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출근을 시작한 후 얼마간은 내가 정말 오고 싶었던 회사라 아마도 뼈를 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었다. 하지만 여러 번 계절이 바뀌고 1년 2년 3년이 지나가면서 내 생각은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써니, 이 영화 한번 봐봐. 네가 좋아할 것 같아."


클라라가 문득 내 책상 앞을 지나가며 DVD 하나를 건네주었다. 클라라는 나의 보스였고, 어머니 같으면서도 친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라 빌려주겠다고 내밀었던 DVD 한 장. 요즘 회사생활에 권태기가 온 것 같다고 며칠 전에 얘기를 해서 그랬는지. 클라라의 배려가 너무 고마웠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이제는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비디오테이프, CD, 카세트테이프, 심지어 DVD까지도, 그땐 아직 그런 것들이 최첨단의 물건이었다. 곧이어 블루레이까지 나오고 생각해 보면 지난 20년간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를 모두 경험할 수 있었던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았다는 게 정말 러키하다고 생각한다.)


"고마워요, 주말에 꼭 볼게요."


DVD 표지를 보니 Office Space라는 코미디 장르인듯한 영화였다. 아마 그때 클라라는 내 인생에 무슨 짓을 한 건지 까맣게 몰랐을 거다. 내가 커리어의 방향을 급진적으로 바꾸게 된 원인 중 하나인 영화 Office Space. 앞표지 타이틀이 참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 Work Sucks!



이 영화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찌든 삶을 최면치료로 해소해 보려다 최면술 도중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극단적으로(?) 여유로운 상태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회사원의 삶을 코믹하지만 정말 현실적으로 표현한 레전드 영화이다.


회사에 힘들게 들어와서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고 안정적인 삶의 궤도에 이제야 올라왔는데, 왠지 점점 이런 삶을 영유할수록 뭔가 내 인생에 울타리를 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일을 열심히 했을 때 오는 보상은 단지 금전적인 것뿐. 그 외에는 다른 만족감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일을 해 볼 생각도 못하고 그 울타리 안에서 안정적이라는 것이 마치 행복한 것 마냥 두 감정을 애써 융합하며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이 영화의 소소한 스토리가 작은 용기를 복 돋아주었다. 그 울타리를 무너뜨린다고 내 인생이 같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이후 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소소히 새로운 삶을 위한 궁리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법대에 다니는 친구에게 부탁해 1학년 법학책을 구해서 읽어보고, MBA/GRE 시험을 준비하고, 유전자, AI 등등 딱히 정해진 주제와 목표 없이 1년간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가며 공부를 해보았다. 하지만 일을 병행하며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선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목표가 없으니 내가 뭘 하면 좋을지 감을 잡지도 못하겠고 시간만 하릴없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러다간 결국 흐지부지 되는 게 아는가 하던 찰나... 내 삶의 방향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도록 동기부여가 된 2번째 영화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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