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정신과의사(9)
한 명은 내과 간호사로 20년을 넘게 일했는데, 내과 병동에서 정신질환 환자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마음이 아픈 환자들을 보살피는 방법을 더 자세히 배우고 싶어서 정신과로 왔다고 했다. 한 명은 일반 회사에 다녔는데, 우울증에 걸린 동생을 보살피다 보니 자연스레 정신건강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4년 만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해 첫 직장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같이 일하던 레지던트 4년 차 선배는 이력이 정말 특이했는데, 의대를 시작했을 때 나이가 40대 중반이었고 레지던트를 시작할 때엔 50살이 다 되었다고 했다. 더 놀라운 건 한국과 인연이 있었는데. 예전엔 미국 공군 파일럿이었고 초음속 초고도 정찰기를 몰고 한반도 상공을 날며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고 했다. 그녀의 꿈은 조그만 중고 비행기를 사서 엠뷸런스로 개조를 한 뒤 병원 접근성이 떨어지는 외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참고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를 보고 깨달았는데. 그녀는 병원 내 모든 레지던트를 통틀어 성적이 탑을 찍었다.)
이렇게 동료들의 스토리를 듣고 있자니 정말 나의 스토리는 다소 진부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이곳까지 오게 된 뚜렷한 목표와 방향이 있었는데,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좀 창피했다고 해야 할까? 왜냐면 아마도 누가 나에게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됐나요라고 물어보면... '두 영화'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서 의학 쪽으로의 커리어 체인지가 두 영화 때문이라고 한다면 솔직히 너무 즉흥적인 결정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영화들이 내가 커리어 체인지를 하는데 확실히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때는 2000년대 후반, 난 Michigan의 Ann Arbor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이 작은 도시는 학교를 중심으로 발달한 일종의 캠퍼스 타운이다. 얼마 전까지 거기서 대학교를 다니다 졸업과 동시에 운 좋게도 근처에 있는 회사에 바로 취직이 되어 그냥 눌러앉게 되었다. 졸업하기도 전에 대기업에 취직이 된 것에 대해 내 친구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운이 좀 좋았다고 생각한다.
졸업을 할 때쯤 되면 여러 기업들이 학교에 방문해 기업설명회를 하는데, 그때 난 성적도 상위권이 아니었고 대기업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과 어느 강의실을 지나가는데 'Free Pizza'라고 쓰인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친구들은 시간 낭비라며 그냥 지나갔지만. 난 어차피 되던 안되던 피자는 하나 먹고 나올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어 강의실로 들어갔다. 벌써 설명회는 시작을 했고 뒷좌석은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남아 있는 피자 몇 조각이 맨 앞 줄에 있었는데 난 피자를 먹고자 하는 본능을 따라 휑하니 비어 있는 앞줄로 향했고 나이가 좀 있어 보이시는 아주머니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료수가 반대편 쪽에 있어 손이 닿지를 않아 옆에 앉아 계신 그분께 음료수 좀 전달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분은 "Sure" 라며 음료수를 잔뜩 가지고 와서 내 앞에 놓아주셨다. 그렇게 게걸스럽게 피자와 음료수를 먹느라 기업 설명회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옆에 앉아 계신 그분께서 계속 이런저런 질문을 해 오셨다. 프로그래밍 경험이 있는지, 언제 졸업하는지 등등... 난 그때 그녀가 미래의 내 보스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만일 내가 그 강의실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지금의 인생과 많이 달라졌을까? 나는 배가 고팠고, 때마침 free pizz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고, 내가 앉을 수 있는 빈자리는 미래의 내 보스 옆뿐이었는데. 난 내심 과학적인 사람이지만 어쩔 땐 이런 사건의 연속성은 뒤를 돌아 생각해 보면 뭔가 순수하게 랜덤 한 이벤트 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것이 랜덤 하던 아니던 그곳에 문을 열고 들어간 내 의지가 이 연속성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트리거 임에는 틀림없다. 두드리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갈 인생의 수많은 이벤트들을 가능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출근을 시작한 후 얼마간은 내가 정말 오고 싶었던 회사라 아마도 뼈를 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었다. 하지만 여러 번 계절이 바뀌고 1년 2년 3년이 지나가면서 내 생각은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그 이후 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소소히 새로운 삶을 위한 궁리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법대에 다니는 친구에게 부탁해 1학년 법학책을 구해서 읽어보고, MBA/GRE 시험을 준비하고, 유전자, AI 등등 딱히 정해진 주제와 목표 없이 1년간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가며 공부를 해보았다. 하지만 일을 병행하며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선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목표가 없으니 내가 뭘 하면 좋을지 감을 잡지도 못하겠고 시간만 하릴없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러다간 결국 흐지부지 되는 게 아는가 하던 찰나... 내 삶의 방향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도록 동기부여가 된 2번째 영화를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