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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열 Aug 21. 2019

'창백한 푸른 점' 같은 중년 남자들의 부성애

40대 남자의 감정 Chapter 3 사랑

어머니의 사랑, 아버지의...

2004년 영국문화원이 개원 70주년을 기념해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102개 국가, 4만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를 조사했다. 그 결과 'Mother'가 1위를 차지했다. 이 결과에 대해 영국문화원 측은 Mother라는 단어가 딱히 발음이 유려하거나 한 말이 아닌데도 1위가 된 것은 그 뜻이 갖는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면 언어의 종류를 떠나 '어머니', '엄마'라는 말이 1위가 된 것이 이상하지 않다.


당시 영국문화원은 70개의 아름다운 영어 단어를 선정했다. 1위는 Mother였으며, Passion(열정), Smile(미소), Love(사랑), Eternity(영원), Fantastic(환상적인), Destiny(운명), Freedom(자유), Liberty(자유), Tranquility(평온) 같은 단어들이 뒤를 이었다. 그럼 아버지(Father)는 몇 위를 했을까? 비록 10위 안에는 없지만 어머니가 1위를 할 정도면 아버지도 아름다운 단어로 뽑히는 데 손색이 없을 것이다. Pumpkin(호박)이 40위이고 Kangaroo(캥거루)가 50위이니 아버지는 그 보다는 좀 더 앞에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름다운 영어 단어 70개의 중에 Father는 없었다


이런 설문의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해서 아버지의 의미나 가치가 축소되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호박이나 캥거루보다 못한 존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1위를 차지한 것에 비하면 아버지는 너무 외떨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적어도 자녀에 대해서만큼은 아버지도 어머니만큼의 애정을 상징한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자녀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 대한 평가는 그 정도다. 일상에서 자녀들이 느끼는 부모의 사랑은 대부분 어머니에게 쏠려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무겁고 과묵하다. 그리고 자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부모님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단어를 묻는 설문이 있었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단어는 사랑이 1위였다. 반면에 아버지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단어 1위는 존경이었다. 존경도 충분히 좋은 말이다. 존경받는 것도 사랑받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사랑과 존경은 큰 차이가 있다. 스피노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외부의 원인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라고 정의했다.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에 대해 기쁨을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는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데는 그 존재 이외의 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성과의 사랑에 빠져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다. 이성과 사랑에 빠질 때는 아무런 조건이 필요 없다. 그냥 상대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뛰고 기쁜 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모와 자식의 사랑도 이렇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데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각자의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반면에 존경은 어떤 대상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대상이 존경할 만한 조건을 갖추어야 존경의 마음이 생긴다. 일반적으로 인격이나 지위, 사상, 업적 따위가 존경의 조건이 된다. 그 조건들의 기준을 정하고 구분하는 것은 일종의 평가다.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객관화시켜야 한다. 결국 존경은 대상을 객관화시킨 결과에서 오게 된다. 바로 그 점이 사랑과 존경의 가장 큰 차이다. 사랑은 지독하게 주관적이다. 못생겼거나, 키가 작거나, 돈이 없거나, 말이 어눌하거나 하는 객관적인 평가의 대상들은 주관적인 사랑의 감정 앞에서 의미가 없다. 키에르케고르가 사랑을 일컬어 '자신에게는 객관적이고 상대에게는 주관적이 되는 경험'이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버지에 대한 자녀들의 거리감은 일상에서도 드러난다. 아버지와 자녀가 소통하는 시간 자체가 적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어머니와 충분히 대화를 한다는 청소년은 63.5%지만 아버지와는 38.4%만이 충분히 대화한다고 답했다. 청소년들이 고민을 털어놓는 대상이 어머니 64%, 아버지 11%라는 설문 조사 결과도 있다. 이런 조사 결과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확연히 구분되는 자녀와 부모 사이의 밀접함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창백하고 푸른 아버지의 별

특히 나이 마흔을 넘어선 중년의 아버지들은 자녀와의 거리감이 커지는 것을 본격적으로 느낀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정서를 나누라고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40대 아버지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10대다. 아버지는 밤낮없이 열심히 일할 나이고 자녀들은 공부에 치일 나이다. 아버지가 일찍 집에 온다고 해도 아이들은 학원 수업으로 밤늦게나 들어온다. 둘 다 귀가가 늦거나 한 쪽이 늦거나 마주칠 시간이 적은 것은 같다. 자녀가 고등학생쯤 되면 공부에 방해될까 염려가 되어서 함부로 시간을 뺏을 수도 없다. 아버지와 자녀 모두 시간이 있다고 해도 각자의 관심사에 바쁘다. 아버지는 TV 리모콘을 만지작거리고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본다. 주말 한적한 시간 아버지가 낮잠을 즐기는 동안 아이들은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다. 아버지와 자녀들이 공통의 시간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 덕분에 정서적 교감의 기회도 줄어드는 것이다.


아버지와 자녀의 정서와 생각 차이도 거리감을 키우는 데 한몫을 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에게 아버지는 말을 붙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아버지가 된 것도 처음인데다가 사춘기 자녀를 경험하는 것도 처음이다. 자신이 사춘기 때 받았던 대접을 자녀에게 돌려줘서는 안된다는 마음만 있지 다른 방법은 알고 있지 않다. 기껏해야 엄마 몰래 용돈이나 챙겨 주는 것으로 마음을 전하는 게 고작이다. 자녀와의 생각 차이도 문제다. 세대는 세대마다의 특성이 있다. 그 특성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의 환경에 따라 변한다. 40대도 한 때는 X세대로 명성을 떨쳤지만 그 경험으로 지금 아이들의 세대적 특성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런 간극들은 생각의 차이를 만들고 소통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덕분에 간만에 하는 자녀와의 대화가 철부지들의 생각없음과 꼰대들의 권위주의가 맞붙는 양샹이 되어버리곤 한다. 


이러 저러한 사정 덕분에 중년에 접어든 아버지들의 욕심은 크지 않다. 아주 욕심을 많이 내야 '친구 같은 아버지', 적당히 욕심을 내면 '나쁘지 않은 아버지' 정도다.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는 권위주의적 아버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애초에 없다. 그런 아버지들의 그늘에서 자라온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느꼈던 부당함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세상도 많이 바뀌어서 이제 그런 아버지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저 자녀들이 예닐곱 살 아이일 적에 자신에게 가졌던 친근함을 지금도 가지고 있어줬으면 하는 것이 40대를 지나고 있는 아버지들의 작은 바람이다.


바라는 것이 적다고 해서 사랑마저 작아진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과묵한 사랑'은 여전하다. 에리히 프롬은 모성애와 부성애의 차이가 조건의 있고 없음이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자녀라는 존재만으로 성립이 가능하다. 안아주기에는 너무 커버린 딸과 속내를 더듬어 보기에는 과묵해져 버린 아들이지만 여전히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이 제일 흐뭇하고 기쁜 사람이 아버지다.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더 해주고 싶고, 자녀들의 미래가 좀 더 편하고 풍족할 수 있도록 현재의 자신을 덤덤하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버지다. 한 보험사에서 설문을 통해 가족 간에 대한 사랑을 점수로 매겨본 적이 있다. 자녀 사랑의 상징이자 모든 가족 사이의 접점이 되는 어머니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자녀가 69.6점이었고 어머니는 67.5점, 아버지는 80.8점이었다. 말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다.


1977년 미국의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발사되었다. 13년이 흐른 1990년,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기 직전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이 보이저 1호의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 사진을 찍자는 제안을 했다. 태양빛에 카메라 렌즈가 망가질 수도 있었지만 결국 보이저 1호는 명왕성 근처에서 지구를 촬영했다. 그 사진 속의 지구는 아주 작은 점에 불과했다. 칼 세이건은 사진 속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그 창백한 푸른 점을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 겨우 빛을 반사하는 작은 별일지라도 지구는 모든 이의 고향이며 앞으로도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도 그렇다. 마흔을 넘어 중년에 들어선 아버지는 예전처럼 강인하지도, 당당하지도 않다. 세상살이에 찌들어 창백한 빛을 내고 있으며 자녀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자녀들이 태어났으며,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그들도 아버지가 될 것이다. 중년을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창백하나마 여전히 푸른빛을 내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옅은 반짝임으로 자녀들의 멀리에서 머물러 있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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