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들이 집을 버리고, 바울이 파산과 굶주림, 매질, 옥살이, 끝내는 형장의 이슬까지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신앙의 길이란 정말 ‘가시밭길 전문’인가 싶습니다. 엘리야, 세례 요한, 예수님, 베드로, 바울 등은 달도 없는 야밤에 산등성이를 뛰어넘는 그림자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 평범한 대중은 그 시각에 평지 마을 집집에서 졸고 있는 호롱불에 더 가깝죠.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도 금욕주의를 권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 같은 절대다수의 인간을 위한 행복이 따로 있을까요?
성경은 인류의 시작과 끝을 전원적인 풍경으로 그려줍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시조는 무수한 식물과 동물들 틈에서 평화롭게 뒹굴었고, 금욕주의의 그림자조차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새 에덴에서는 밤도, 눈물도, 고통도, 노동도 없고, 모두가 생명강가에서 양처럼 평화롭게 산다고 하죠. 창세기와 계시록 모두 “금욕은 필수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듯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신명기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은 젓과 꿀이 흐르는 땅, 하늘에서 내리는 비, 풍성한 수확, 배불리 먹고 잘 사는 삶으로 약속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지, 금욕을 즐기는 신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도 살아생전 잔치집에 초대받아 포도주를 즐기셨고, 부활 후에는 생선도 드셨습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 철학이 아니라, 몸을 가진 인간의 행복을 긍정하는 종교입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행복이 하느님의 뜻”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아가서에서는 두 남녀의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며, 몸의 즐거움을 성경 안에 당당히 끌어들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아름다움은 사랑을 부르고, 참사랑은 생의 아름다운 즐거움을 준다”고 했죠.
여기서 노자도 한마디 거듭니다. “이름과 몸, 어느 것이 더 귀한가? 명예나 재물보다 몸을 더 소중히 여기라.” 재물에 집착하면 결국 몸을 해치고, 만족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요. 동서고금의 지혜가 몸과 삶의 소박한 행복을 강조합니다.
전도서 저자는 네 가지를 가르칩니다. 먹고 마시라, 꿈도 꾸고 말도 많이 하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 너무 선하게 굴지도 말라. 하지만, 이게 “개나 돼지처럼 살라”는 게 아닙니다. 몸의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되, 먹고 마시는 것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알고, 꿈과 말 속에서도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잔치집의 즐거움과 초상집의 슬기를 함께 배우라는 중용의 철학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대다수 평범한 인간들이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곱 가지로 요약해봅니다.
첫째, 하느님이 주신 세상과 몸을 적극적으로 즐기자. 산딸기, 머루, 따뜻한 커피 한 잔, 모두 하느님의 복입니다.
둘째, 재물보다는 명예, 명예보다는 몸, 몸보다는 슬기를 더 소중히 여기는 ‘자동 변속기’ 같은 삶의 우선순위를 익히자.
셋째, 몸을 놀리되, 때때로 고요한 묵상에 잠기자.
넷째, 끝까지 밀고 나갈 용기와, 일찌감치 포기할 줄 아는 지혜를 구분하자.
다섯째, 경쟁에서 이겼을 때의 기쁨보다, 창밖의 달빛, 책상 위 꽃, 아침 햇살 같은 소박한 기쁨을 더 귀하게 여기자.
여섯째, 불우한 처지에서는 “그래서 뭐?” 하고 대범하게 넘기거나, 인생의 슬기를 배우는 기회로 삼자.
일곱째, 물러날 때와 불속으로 뛰어들 때를 알고, 몸의 즐거움과 삶의 지혜를 조화롭게 정돈하자.
이렇게 성서의 중용철학을 따라 살면, 우리도 길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평야에서 가물거리는 호롱불처럼 소박한 행복을 누리다가, 가끔은 산등성이를 넘는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영원한 길에 오를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신다는 사실, 이 소박한 진리를 오늘도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커피 한 잔에 담긴 햇살을 음미하며, “이 몸뚱아리와 이 하루, 하느님이 주신 복이로구나!” 하고 웃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