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넘어서는 자아 찾기
물건은 부피가 있고, 사이사이엔 간격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언젠가 유통기한이 다해 사라진다. 이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뇌, 심장, 내장을 품은 부피를 가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엔 관계라는 간격이 있다. 그리고 누구나 유효기간이 있다. 마트에서 산 두부도, 내 옆자리 동료도, 심지어 나 자신도 언젠가는 유통기한이 지난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히 공간과 시간에 갇힌 물건이 아니다. 꿈과 가능성을 품은 존재, 바로 ‘의식’이다.
이웃 행성인 화성이나 달에는 아직 인간이 없다. 그래서 그곳의 공간은 텅 비고, 시간은 의미를 품지 못한다. 반면, 지구의 서울과 평양은 어떨까? 평양은 이념으로, 서울은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평양의 시간은 감격해야 할 의무로, 서울의 시간은 충격받아야 할 필요로 가득하다. 북쪽은 구약시대처럼 우상 숭배가, 남쪽은 신약시대처럼 귀신 들림이 판친다. 결국 윗동네는 인간을 가축처럼, 아랫동네는 병든 가축처럼 만들어낸다. 우리는 문명과 문화를 창조해 놓고, 자신을 그저 시공간의 한 품목쯤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이쯤에서 바보 이야기 하나. 한 바보가 시장터에서 혹시 자기를 잃어버릴까 봐 빨간 줄로 발목을 기둥에 묶고 잠들었다. 장난꾸러기 한 명이 줄을 풀어 자기 발에 묶어놓았다. 바보가 깨어보니, 줄에 묶인 건 옆사람이고, 자기 발엔 줄이 없다. “저 줄에 묶인 게 분명 나인데, 여기 있는 이 육체는 뭔가?” 지금 우리도 소유, 지위, 이념, 욕심이라는 빨간 줄에 스스로를 묶고 자아를 잃은 채 살아간다.
또 이런 일도 있다. 제자가 스승에게 “진리가 무엇입니까?” 묻자, 스승이 “누구에게 말해주랴?” 한다. “저에게 요!” “아직 자네가 없는데, 누구에게 말한단 말인가?” 자아가 부재한 상태를 꼬집는 이야기다.
교회는 어떤가? 참고서 답만 외우고 문제는 모르는 학생처럼, “내가 왜 교회 문을 두드렸는가?”라는 질문 없이 해답만 외우는 인간을 만든다. 두 사람이 “서울에서 만난 적 있죠?” “아뇨, 저 서울 안 가봤는데요.” “저도요. 그럼 우리 말고 다른 두 사람이 만났겠군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게, 바울이 만난 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철학자와 도둑이 감옥에서 탈옥하다 기왓장을 떨어뜨렸다. 교도관이 “누구냐?” 하니 도둑은 “야옹!” 철학자는 “저는 고양이인데요.” 우리는 예수의 “야옹” 소리가 아니라, 신학과 교리라는 “고양이예요”만 반복한다.
상술 좋은 사람은 고객이 원치도 않는 물건, 자기도 없는 물건을 판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원치 않고, 본인도 경험 못 한 걸 전도한다.
하지만 인간은 시공간의 조각이 아니다. 고뇌를 지녔고, 시공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가진다. 진정한 예배는 인간이 짜놓은 시간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비로소 성전도, 예배도 진짜가 된다. 예수도 “이 성전을 헐라”라고 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하지 않으면, 성전은 있으나 마나다.
시간이 멈춘 사람은 어떤가? 교수형을 앞둔 죄수가 “나는 이 진창을 한 번만 밟으면 되지만, 당신들은 계속 밟아야 하니 안 됐어요!”라고 웃는다. 이것이 시간이 멈춘 자의 여유다.
어떤 이는 깊은 묵상 중 모든 사물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고요함의 천둥을 듣는다. 공간이 붕괴하는 체험이다.
인간은 하드웨어(몸)와 소프트웨어(의식)로 이루어져 있다. 몸은 시공간 안에 있지만, 의식은 그 시공간을 창조하는 주체다. 그러니, 오늘도 빨간 줄을 풀고,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하루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