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맨모삼천지교 Jan 22. 2023

세상에 더해보는 다정함의 총량

지난해.

우리 집에 가족이 하나 늘었다.

내가 낳지 않은 다른 '동물'이 낳은 우리 가족.

이 작은 생물이 온 가족의 삶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주말이면 밖에 나가서 집으로 돌아올 줄 모르던 우리 가족의 일정은, 집에 반려견을 두고 나가면 혼자 외로워할 눈빛이 떠올라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변화했고, 여행지를 고를 때면 반려견을 대동하고 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아침 6시면 침대가로 와서 내 손을 핥아대는 이 작은 친구 덕분에 기상시간은 다시 갓난아이를 키우던 시기로 회기 했고, 한 번의 여행에 챙겨야 할 짐은 배로 증가했지만.

검은 눈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이 매일 내 안에 차올라, 더 이상 자랄 자리가 없는 줄 알았던 내 사랑의 총량이 조금씩 매일매일 자라남을 느낀다.


이 강아지를 키우며, 반려동물을 돌보며 자라는 내 마음의 평안과 기쁨의 영역을 알게 되면서.

아이를 낳고 키우며. '사람'으로 인해 변화한 '나'라는 '사람'을 보며 매일매일이 신기했던 8년 전의 나를, 그리고 그 이후의 나를 자꾸 떠올리게 되고는 한다.


해보지 않은 일,

만나보지 않은 사람,

경험해 보지 않은 일들.

이런 영역으로 발을 한 걸음씩 내 걸으며 자라는 많은 것들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


꽤 오래 전의 어느 여름날.

당시 초등학교 3-4학년 즈음의 아들을 키우던 동료 A와 점심시간에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나에게  이것 좀 보라며 핸드폰 속의 전 날 찍은 아들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당시 유행하던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를 따라 하던 화면 속 아이는, 스스로가 너무 웃긴 나머지 대사는 커녕 깔깔거리다 드러누워 버렸다. 드러누워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이 핸드폰 안에 가득했고, 그걸 보여주며 너무 귀엽지 않냐고 웃는 동료를 보며 당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겨우 두 살 반이었던 내 아이에 비해, 청년 같이 커 보이는 열 살 아이를 보며..

'아이가 저렇게 많이 커도 엄마 눈에는 여전히 귀엽구나!'라고 말이다.

(세상에. 겨우 열 살인데. 그 당시의 나에게는 '엄청 큰 어린이'는 다 컸다고 생각했었다. 허허....)


그러니까, 갓난아기 티를 이제 막 벗고 엄마, 아빠를 바라보며 웃어주는.... 말랑말랑한 찹쌀떡 같은 피부의, 발바닥도 아직 보들보들 오동통한 생겨 아이를 키우고 있던 나였기에. '애기미'는 사라지고 어엿한 '어린이'에 속하는 큰 아들(이라 쓰지만. 겨우 열 살이었다.)을 키우며 [귀엽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동료가 신기하게 느껴졌던 듯하다. 이미 사춘기가 코 앞인 듯 해 보이는 아이를 보며 "귀엽다"라는 단어로 말하시는 동료를 보며, 나에게도 내 아이가 저렇게 커도...'귀엽다고 말하는 날이 올까? 그때도 아이는 계속 내 눈에는 귀여울까?'라는 생각을 하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났고.

이제 내 아이가 당시 동료의 아이와 같은 나이로 자라났다.

정수리에 코를 가까이 가져가 킁킁해도 달근달근한 향을 뿜어내던 아기는, 이제는 나름의 바쁜 하루 끝에는 어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땀냄새를 풍기는 아이로 자라났다. 눈이 아프도록 쨍한 핑크색만 입겠다고 고집부리던 꼬마는 어디 가고, 친구들이 이런 옷을 입는다며 갖고 싶은 옷을 이야기하는 꼬마숙녀가 되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엄마 랑 떨어지는 것이 무서워 작은 두 손으로 안간힘을 써서 내 손을 잡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혼자 학원에서 돌아오겠다며 이제 꼭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여전히 사랑스럽고. 여전히 “귀엽다.”

어린 아기의 재롱과 다른 방식으로

나를 울리고 웃긴다.

함께 시 필사를 하는 모임에는 ”수염 난 아이“를 키우고 있다 말씀하시는 선배님들이 몇 분 계시는데, 그중 한 분이 어느 날인가 나태주 시인의 “예쁨은 힘이 세다.”라는 시에 이런 단상을 남기신 적이 있었다.

[[초등고학년부터 중등 연령대의 남자애들은 세상에서 가장 안 예쁜 존재들이었습니다. 까불고,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고, 거기에 수염이 거뭇거뭇 나기 시작이라도 하면 외모가 중닭(?) 같아서 정말 예쁨과는 거리가 멀고 제 마음에서도 가장 먼 존재들이었어요. 그런데 아들을 두 명 낳고 키우면서 이 아이들의 예쁨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딱 중닭이었던 중학생 시절, 귀여움이 사라져 가는 건 아쉽지만 변해가는 목소리도, 거뭇거뭇 보이는 수염도 전혀 이 아이의 존재와 이질적이지 않고 예뻤습니다. 그리고 그런 애들이 몰려다니면서 깔깔대고 서로 조롱하는 모습도 그렇게 예쁘고요. 그렇게 예쁨의 정의가 매우 확장되는 경험을 했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큰 애가 좀 있으면 성인이 되는지라, 지금은 군인들이 그렇게 예뻐 보이는 웃픈 현상이) 이렇게 아이들의 성장에 따라 예쁨이 확장되면 인류애가 충만해질 것 같아요.

내 아이를 자세히 오래 지켜보며 키워보니, 내 좁은 시야를 뛰어넘어 다양한 단계들을 거치고 있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예쁨이 보이기 시작해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얘기했던 시인도 그런 마음으로 예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이혜령 님의 단상 중-]]


나 역시 나의 아이를 보며, 같은 나이의 아이들을 보는 내 시선이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졌다. 아이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내 시선 안에 “귀여워 보이는 아이들”이 늘어난다. 내 아이를 알게 되는 만큼, 아는 만큼 사랑스럽다.  그렇게 나의 아이가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한 살 씩 더 많아지는 것을 느낀다. 두 살 아이의 귀여움을 알았다며. 여덟 살과 열 살의 해사함과 발랄함을 알게 될 것이리라. 그리고 이제 곧 그 범위는 자라나 청소년으로, 성인으로 퍼져나가게 되지 않을까.


아이를 키우고, 개를 키우는

해 본 적 없는 일들을 하며, 그 경험의 범위만큼 보이고 그 폭만큼 자라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내가 알지 못해서 더하지 못하고 있을 다정함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지고는 한다. 그래서, 계속 둘러봐야 하려나 싶다. 내가 가본 적 없는 삶, 내가 보려 한 적 없는 곳들을 향해 더 열심히:)



매거진의 이전글 너의 생각을 따라 도는 11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