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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Feb 04. 2022

일단은 횡재, 새싹보리 씨앗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일단은 횡재다.


누군가 버린 씨앗을 주워 들고 횡재라 하기엔 조금 거시기하기도 머시기하기도 하다. 하지만 싹이 터 주기만 한다면 보리 씨앗의 금맥을 잡은 바와 다름없다. 많아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분리수거를 하러 내려갔다. 부지런한 경비 아저씨께서는 오늘도 뚝딱뚝딱 뭔가를 만들고 계셨다. 분리수거가 끝나고 돌아서는데 경비 아저씨께서 혼잣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그 말씀이 주변에 있는 사람 들으라시는 듯 크다. 아는 체할 사람은 해도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게 뭐지?"

분리수거장엔 경비 아저씨와 나밖에 없었고 경비 아저씨의 독백 같은 의문문에 아는 체를 해도 괜찮을 여유도 있었다. 글씨가 작아 안경 쓰지 않은 눈으로는 뭔지 알아볼 수 없었다. 아저씨가 커다란 봉투 안에서 작은 포장 하나를 꺼냈다. 내가 다가선 것을 알아차린 아저씨가 물었다.

"이게 뭐예요?"

"글쎄요? 글씨가 작아서...... 아 씨앗인데요. 새싹채소 씨앗이네요."

"새싹채소요?"

"네, 씨앗을 불렸다가 키워서 새싹만 잘라먹는 그 새싹채소요."


아저씨가 손에 든 작은 봉투의 자르는 선을 따라 주욱 찢었다. 겉보리 씨앗이다.

"이거 보세요, 보리죠?"

"네, 보리 맞네요. 누군가 보리새싹 키워 먹으려고 씨앗을 샀었나 봐요. 근데 너무 많군요."


중간 크기의 흰 비닐봉지에 포장된 새싹채소 씨앗들이 반 정도 담겨 있었다. 작은 포장을 뜯어 비닐과 씨앗을 분리하지 않고 그대로 분리수거장에 내어 놓은 걸 보면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갖다 써도 좋으리라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얼핏 눈에 들어온 새싹채소 씨앗은 겉보리와 적케일이다.




경비 아저씨가 작은 포장들을 바닥에 쏟기 직전 손으로 막으며 재빨리 물었다.

"버리시려구요?"

"그럼 이걸 다 뭘 해요?"

"그럼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그러세요."

"고맙습니다. 새싹용 씨앗이지만 우리 텃밭에 뿌려봐야겠어요. 아저씨가 심으실 만큼 남기시고 주시는 만큼만......"

"뭘 드려요, 전 필요 없어요. 누구든 가져가라고 여기 뒀나 본데요."

작은 포장 몇 개만 들고 오려다 몽땅 들고 올라왔다. 분리수거장에 있던 봉지에서 내 집에 있는 깨끗한 봉지로 작은 씨앗 포장들을 쏟아부었다. 대부분이 겉보리 종자이고 간간이 적케일 씨앗이 섞여 있다. 누군가 건강을 위해 겉보리 새싹을 키워 먹을 생각이었던가 보다.

하지만 겉보리 씨앗을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구입한 걸 보면 지극히 초보자임을 알 수 있겠다. 몇 번 실험으로 키워본 후에 성공하게 되면 다량 구입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나부터 예외는 아니다. 많은 이들이 처음 무언가에 관심을 갖게 되면 앞뒤 생각 없이 권하는 모든 것을 구입하게 된다. 이 씨앗을 분리수거장에 내놓은 이도 그랬을지 모른다. 혹은 새싹채소 강사인데 유통기한이 지난 씨앗이 많이 남아 내놓은 것일 수도 있다. 

물불림 후 제대로 된 싹이 돋아나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텃밭에 뿌려두면 멧돼지나 새들이 다 먹지 않는 한 대물림할 씨앗 정도는 거둘 수 있겠다. 가을걷이 때면 내년엔 다시는 씨앗 뿌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돌아서면서 내년 봄에 뿌릴 씨앗을 챙기는 나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올봄엔 더 많은 씨앗을 뿌려보라고 나를 채근하기라도 하는 듯 겉보리 씨앗까지 보시를 받았다.





새싹보리에는 식물성 천연 지방 알코올 혼합물인 폴리코사놀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폴리코사놀은 여러 식물에 들어 있는 성분으로 성장기 어린이의 성장에 이로울 뿐만 아니라 콜레스테롤 수치 조절과 유해산소 제거, 숙취 해소, 빈혈 예방, 다이어트 효과 등 우리 몸에 이로운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십여 년 전부터 새싹보리를 직접 키워먹는 열풍이 불기도 했다. 호기심 많은 나도 젊은 새싹보리 전도사로부터 작은 종이컵 하나 분량의 보리 씨앗을 구해 심어보았던 적이 있다. 그 무렵만 해도 여러 가지 실패 경험이 쌓였던 터라 일단 키워서 먹어본 후에 필요하면 대량을 구입하기로 약속한 참이었다. 친정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이른봄 보리순된장국에 대한 새록새록한 추억도 한몫했다. 봄마다 친정어머니의 냄새를 맡듯 보리새우 넣고 끓인 보리순된장국을 먹을 수 있다면 봄은 기력도 보충하고 조금은 더 새롭게 기다려질 법도 했다.


보리는 싹도 잘 텄고 잘 자랐다. 보리새싹은 건조해 분말 형태로 먹을 수도 있다. 나는 일단 된장국부터 끓여보았다. 친정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맛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친정어머니의 보리순된장국은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하는 들판에서 자란 보리싹으로 끓인 된장국이라면 나는 베란다 햇살을 받아 자란 보리순으로 끓인 된장국이니 그 맛과 향이 어머니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터였다. 무엇보다 우리 몸은 변덕스러워서 좋은 것을 경험하면 더 좋은 것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도 입은 더 변덕스러워서 어머니의 보리순된장국을 먹은 어린 날 이후 더 달고 더 맛있는 것에 날마다 길들여져서 이제 옛날 보리순된장국의 맛은 생각 속에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딱 한 번 보리새싹을 키워 본 후 새싹보리 키우기는 중단했다. 이후 새싹보리의 부작용에 대한 기사가 뜨기도 했었다. 텃밭에도 보리 씨앗을 두 해 정도 뿌렸던 적이 있다. 물론 텃밭에 뿌린 보리는 겨우내 멧돼지를 불러들이고 배고픈 겨울 새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보리는 내 밭에서 고구마와 옥수수 다음으로 퇴출되었다.




새싹보리 씨앗 한 봉지를 물불림 중이다. 보리 씨앗은 발아율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묵은 보리 씨앗이라면 발아율이 현저히 떨어질지도 모른다. 발아가 잘 된다면 쓰일 곳이 없어서 못 쓸 리 없는 새싹 보리 씨앗이다.

보리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져 보리 벌판을 이룰 수도 있다. 푸른 물결에서 황금물결로 변해가는 들판을 상상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성경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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