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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Apr 18. 2022

벚꽃잎 스크럼

하루살이의 사리 빚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조지훈, '낙화' 중에서)


조지훈 님의 시구가 바람을 타고 온 동네방네 골목골목을 날아다닌다. 오래 피어 있기를 바라는 내 마음과는 달리 벚꽃이 활짝 피면서 살랑바람이 불어와 벚꽃잎이 살랑살랑 날아 내렸다. 그러던 살랑바람도 꽃잎 날리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나 보다. 엊그제부터 비와 함께 바람이 심하게 불기 시작했다. 벚꽃잎들이 바람결에 휘익 몰려 한꺼번에 떨어졌다. 이미 떨어져 있던 꽃잎들은 구석으로 구석으로 밀려들었다.


감히 밟을 수 없는 꽃잎들이다. 그늘에서 핀 꽃들은 밝은 햇살 아래서 핀 꽃잎들에 비해 붉은 기운이 진하다. 어디든 바람 피할 자리라면 망설임 없이 찾아드는 꽃잎들에게 차도와 보도를 가르는 경계석은 바람 진한 날 특히 좋은 피난처다. 




꽃은 봄이 보고파 피어나지만 꽃에게는 봄과의 추억만을 품고 떨어져 내려 흘러갈 수도 있는 찰나의 강단이 있다. 바람이 또 불었다. 벚꽃잎들이 내 머리와 등을 때렸다. 황홀한 통증에 전신이 짜르르하다. 나 더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붙박이 되어 바람이 지날 때까지 몇 그루 벚나무 아래를 벗어나지 못했다. 휘청, 발아래 벚꽃잎이 두엇 밟혔다. 파삭, 방금 튀겨낸 쌀 튀밥 씹는 소리를 들었다.


한 줌 집어 두 볼이 통통해지도록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면 할머니도 어머니도 동생들도 환하게 행복하던 지난날이 오늘 여기까지 소환되어 와 펼쳐져 있다. 방금 튀겨낸 쌀 튀밥이라고, 지나가는 누구라도 한 줌씩 집어 드시라고. 아버지 일이 풀리면서 힘겨웠던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되던 어느 날이 그림처럼 벚꽃잎 위에 그려진다.




바람이 분다. 나는 이제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는 시인의 시구에 감히 대거리한다. 꽃은 봄이 보고파 피어나지만 봄이 부르는 소리와 향기가 없었다면, 무엇보다 그 사이에 살살 간질이는 바람이 없었다면 결코 얼굴을 내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꽃이 지는 것 또한 순전히 바람의 시기와 질투 때문이라고 말이다. 봄이 왔다고 꽃을 불러내기는 했지만 봄과의 사랑에 빠져 저를 불러낸 바람을 모른 체하는 꽃에 대한 바람의 삐침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 봄 내게 아쉬움을 남기는 것은 모두 내가 아닌 누군가의 탓으로만 돌리고 싶은 것이라고 말이다.


바쁘게 걷는 이들조차 벚꽃잎을 밟지 않으려 조심조심 까치발 걸음을 걷는다. 그럼에도 내 귀엔 여기저기서 파삭파파삭 소리가 들린다. 바라보는 맛남, 벚꽃잎에 배부르다. 알코올에 강할 것 같은 아저씨도 벚꽃잎에 취해 비틀거린다. 이 모두가 바람 탓이다. 봄바람 탓이다. 벚꽃잎들이 또 한쪽 구석으로 와르르 몰려간다. 


추억은 파삭 깨어져도 아프기보다 아름답다.

지는 꽃잎들의 여린 스크럼이라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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