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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Apr 19. 2022

토마토 꽃이 익었습니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참 놀라운 계절이다, 봄은.


그 안에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는지 파헤쳐 보고 싶다. 누군가는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팔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계절이란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은 어느 계절이라고 제외할 수 없겠지만 특히 봄에 대한 내 생각은 조금 더 각별한 듯하다. 나이 들어가면서 소생은 이제 나와는 거리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데서 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겠다.


자연에는 아무리 오래 그리고 깊이 파헤치고 살펴봐도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임은 물론이다. '해와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님)를 읽을 때마다 받는 느낌은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것들을 시인이 느낀 대로 모두 느낄 수는 없으며 더더욱 만져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봄도 그렇다.





커다란 깔라만시에 기대어 자라고 있는 토마토에 꽃이 피더니 열매가 맺혔다. 겨우내 푸른 열매를 달고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면서도 열매를 떨구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겨울임에도 초여름 같았던 배란다의 훈훈한 덕을 보았는지 열매에 붉은 기운을 머금었다. 응애가 낄까 염려되어 계피 알코올을 뿌린 탓에 계피물이 들어 토마토 잎도 꽃줄기도 본래의 색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토마토가 열리고 익어가면서 드디어 꽃이 결실의 대장정을 접을 시간은 이렇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매일 살피면서도 3화방까지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하도록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이런 관심도 관심이라 할 수 있을까 싶다. 하지만 인간의 관심과는 무관하게 토마토는 익어간다. 다만 영양 부족에 대해서만큼은 토마토가 나를 향해 눈을 치켜떠도 할 말이 없다. 방울토마토가 아닌 것이 방울토마토처럼 작게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봄에는 다소 엉뚱한 것들에게도 그러려니 눈 감아 주자.


좋아하는 것들에게는 많은 것을 용서하듯이 봄도 내게는 그러하다. 내 순진한 편견이다. 하지만 편견이 있어 더 살 만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 내게 언제나 호의적인 어떤 사람들이 이런 순간 초당 지나간다는 영상필름의 수보다 더 빠르게 흘러간다. 나는 어쩌면 나를 옳고 곱게 봐주는 어떤 편견들을 먹으며 성장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과 친구들과 이웃들, 그리고 저 먼 데 보이지 않는 별빛들까지.





이 꽃대도 처음 보았을 땐 분명히 여러 개의 꽃봉오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 늦게 올라온 꽃봉오리들은 말라가고 한 송이만 활짝 피어 있다. 사라진 꽃봉오리들 대신일까. 활짝 핀 꽃송이 아래쪽으로 곁가지 모양의 새순이 올라오고 있다. 


욕심도 많다. 꽃도 피고 새순도 내고 싶다는 뜻인가 보다. 겨우내 어떤 위기의식을 느꼈었는지도 모른다. 베란다에서 추위를 견뎌야 했던 토마토로서는 일거양득이요 일석이조의 완성이라 할 만하다. 잘했다. 일타쌍피라 하려다 생각을 고쳐 먹는다. 언젠가 인터넷에 올라온 질문 중에 일타쌍피가 고사성어냐고 묻는 질문에 어떤 이가 그렇다고 답을 달았던 대목이 떠올라서다. 우스개 글에는 분명 잘 어울릴 일타쌍피가 고사성어의 반열에 올랐구나 싶었던 일이 떠올라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봄에는 욕심이 다소 과해도 용서해 주자.


아무리 생동하는 생명이라도 봄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과감한 일을 행동에 옮길 수 있겠는가. 어떻게 열매를 기다리고 어떻게 저 곁순 같은 토마토 꽃송이를 키워내야 할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며 생각하자. 내가 지나치게 한가하고 무료한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라도 할까 싶어 저라도 살펴보고 지내라고 기회를 주렸는가 보다. 그래, 일타쌍피가 고사성어라 우겨도 용서해 주자.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버젓한 고사성어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을 거라 믿어보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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