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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Aug 27. 2022

신발 끈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그녀는 오른쪽 편마비 환자다.

이른 아침 둘레길을 걷고 있으면 그녀가 힘겹게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오른팔은 얌전히 접은 채 겨드랑이에 스틱을 낀 왼팔로 난간을 잡으며 올라온다.


그녀는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같은 시각에 둘레길을 걷기 위해 나왔다, 

그녀는 오른쪽 편마비 환자다, 

그녀는 많이 야위었다,

그녀는 같은 단지에 사는 여자다,

이 정도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지금껏 지금껏 1년이 다 되어가도록 둘레길을 걸으며 그녀를 보았지만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와 정면으로 눈 한 번 마주친 적 없이 시선 밖으로만 보아왔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는 그녀의 신발 끈이 풀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나는 다만 그녀의 신발 끈을 묶어 정리해 주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오른쪽 편마비 환자인 그녀의 오른쪽 신발 끈이 질질 그녀를 따라온다.

덜덜덜 소리라도 낸다면 그녀가 알아차릴 수도 있을 텐데 안타깝다.


한 걸음 한 걸음 스틱에 의지해 그녀는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나는 오른 손바닥을 펼쳐 세워 보였다.

당황한 듯 걸음을 멈춘 그녀 앞에 기사인 듯 청혼자인 듯

나는 말없이 한 무릎은 세우고 다른 한 무릎은 꿇고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길게 풀려 있는 그녀의 신발 끈을 묶었다.

이 정도면 신발이 헐겁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그녀는 헐거움을 느끼기엔 아직 마비가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이 신발은 끈이 자주 풀려요. 그래서 이렇게 지나가는 분들이 묶어주곤 하죠."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이 든 여자의 약간 두툼한 서울 말씨다.

오래 멀리 걸어도 삐져나오거나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묶은 신발 끈을 한 번 더 묶어 잘 여며 주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처음으로 그녀와 눈을 정확하게 맞췄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녀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나보다는 몇 해 더 살아온 티가 난다.

나보다 젊지 않아 다행이다. 


잘못 매거나 느슨하게 매면 잘 걷던 걸음도 흐트러져서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신발끈.

꼭 맞게 잘 잡아매면 느리더라도 먼 길 어디까지든 갈 수 있도록 돕는 신발 끈.





그녀는 한때 잘 걷던 걸음 걷는 법을 잠시 잊었을 뿐이다.

지금은 잊어버린 걸음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있다.

그녀는 조만간 스틱을 던져 버리고 잰걸음으로 둘레길을 걷게 되리라.

저리 열심히 연습하는데 좋아지지 않을 리가 없다.

둘레길을 걷다 마주치면 눈인사 나눌 사람 하나 늘었다.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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