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온 김에 구석구석 다 가보는 거야!
다카마쓰에서 맞는 두번째 날 아침. 이부자리에서 부지런히 몸을 일으켰다.
‘너무 북적이지 않게 온천을 즐기려면 조금 서둘러야 해.’
호텔 식당 창가에 앉아 간단한 음식으로 속을 따뜻이 채우고 가방을 들쳐 메었다.
다카마쓰역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발걸음만큼, 날씨도 상쾌했다.
다카마쓰는 일본의 국토를 이루는 큰 섬 지형 가운데 ‘시코쿠’ 지역에 있고,
이 ‘시코쿠’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명탕이라고 불리는 ’도고온센‘을 품은 ’마쓰야마‘라는 도시도 있다.
3시간 정도 열차를 타고 마쓰야마로 당일치기 온천을 즐기러 가볼 참이다.
이왕 한바탕 훑기로 마음먹고 간 일본이라면, 시코쿠에서 다카마쓰, 마쓰야마 두 군데는 꼭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바깥 구경을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를 반복하다, 마쓰야마역에 내렸다.
일본의 근대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옛 감성의 노면 전차.
마쓰야마역 앞에서 이 전차를 타고 도고온천을 포함 시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다.
도고온천역에 내리니 인력거며, 시계탑, 높지 않은 건물들이 과거의 시간으로 이동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눈을 뜨자마자 세수, 양치만 하고 여정을 시작한 탓에 따끈한 목욕부터 즐기고 싶어 곧바로 향한 곳은.
도고온천의 별관인 ’아스카노유‘.
본관은 공사 중이기도 했고, 오래된 건물보다는 좀 더 깔끔한 신식 건물에서 목욕을 하고 싶어 선택했다.
토요일이긴 했지만 오전 시간에 방문한 덕에 사람이 거의 없어 여유롭게 탕을 즐길 수 있었다.
두어시간이 지나 개운하게 목욕을 마치고 나서 주위의 상점가를 천천히 구경하면서 점심 메뉴를 생각했다.
목욕한 후에는 달콤한 것이 당긴다는 걸 귀신같이 알고 전시되어 있는 듯 한 색색깔의 롤케이크들.
목욕탕 표시의 불도장을 찍은 녀석도 있고, 밀크 카라멜 박스에 담긴 것도 보기에 꽤 앙증맞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끌렸던 것은 목욕 후의 갈증을 확 풀어줄 것만 같았던 귤 주스였다.
마쓰야마 온천이 위치한 에히메 현의 특산물이 바로 ‘귤’이라고 한다.
상점 어딜가도 품종 별로 갖가지 귤 생과와 말린 것, 귤 주스, 귤 과자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여러가지 종류 중에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이 들어간 주스를 골라 갈증을 달랬다. (마쓰야마는 나쓰메 소세키의 고향이다.)
달고 진한 맛의 ‘진짜 귤 주스’였다.
갈증을 달랜 후에는 허기가 몰려왔다. 별 고민 없이 아무 식당에 들어가 텐동을 주문했다.
텐동 전문점이 아니었지만 한국의 텐동과 비교하면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을만큼 다채롭고 뜨겁고 깔끔한 맛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도고온천 본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1층은 울타리를 치고 한참 공사 중이어서 몇 달은 걸릴 듯이 보였다. (지금은 다시 오픈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온천탕 건물로 도고온센을 발상에 참고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밤이 되면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환하게 빛을 내며 북적일 것만 같으면서도 오래 한자리를 지켜온 세월의 묵직함도 느껴졌다.
이날 알게된 마쓰야마에 오면 꼭 사야한다는 특산품은 뜻밖에도 ‘수건’이었다. 유명 온천과 수건은 어쩐지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이마바리 타월‘은 150년의 역사와 기술력을 간직한 일본의 명품타월로 불린다.
먼지없는 수건, 잘 마르는 뽀송한 수건으로 유명하다.
매장에 들어가니 누가 봐도 ‘아 이건 일본 수건이다’ 싶은 알록달록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우리집 화장실에 걸었을 때를 자연스럽게 상상하며 이것저것을 만지며 구경해보았다.
얇은데 톡톡하고 보송한 수건의 묘한 촉감에 이끌려 결국.
세안수건 세 장에 약 5만원 정도를 지불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아.. 그때 목욕타월이나 주방용 수건도 사올걸 그랬다’ 싶은 아쉬움도 여전히 남아있다.
마쓰야마에서 오래 머물지 않을 생각으로 방문했기 때문에 목욕, 쇼핑을 마친 후 다시 다카마쓰로 발길을 돌렸다
노면 전차를 타서 고개를 들어 보니 내부가 온통 ‘귤천지’이다.
’진짜 귤이 매달린건가?‘
일어나서 기어코 손잡이를 만져봤을 정도로 그 디테일함이 놀랍기도 하고.
삐걱거리는 마루바닥을 간직한 전차가 힘차게 움직이는 것도 신기했다.
다시 목욕하러 또 들를지는 모르지만, 또 온다면 이마바리 수건을 여러 장 더 사갈 것을 확신한다.
떠나는 마지막까지 날 감탄하게 만들었던 호빵맨 열차.
키덜트들을 위한건지, 열차 방송에서도 호빵맨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문득 그 옛날 동생들과 TV 앞에 앉아서 만화를 보던 때가 그리워졌다.
3시간 동안 열차를 타고 다시 다카마쓰역으로 돌아왔다.
열차 안에서 아무것도 못 마셔서 그랬는지 또 갈증이 느껴졌다.
‘그래, 나도 이번 참에 일본 스타벅스에서만 파는 걸로 한번?’
향만 적당히 풍길 줄 알았는데 어느 하나 서툴지가 않고 멜론 그대로의 풍미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고호비(ご褒美),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이라는 뜻이다. 이름 뜻도 참 고급스럽고 멋지다.
한 번만 먹기에는 아쉬워서 다음 날 또 사먹었다. 몇 번이고 나에게 스스로 보상해주고 싶은 맛이었다.
호텔에 들어가기 전 내친 김에 ‘역전 우동’으로 저녁을 때워보기로 했다.
다카마쓰의 우동집은 대부분 ‘셀프’이다.
먹을 우동 메뉴를 고른 다음, 식판을 들고 사람들을 따라 이동하면서 우동에 곁들일 튀김이나 주먹밥을 고른다.
마지막에 음식 값을 치르고 편한 자리를 찾아 앉으면 된다.
‘우동현’이라고도 불리는 다카마쓰에서 먹는 ‘첫 우동’인 만큼, 가장 기본인 가케우동을 선택해 보았다.
맑고 짭짤한 국물에 튀김 부스러기를 올린 가장 보통의 비주얼.
이 보통의 비주얼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것은 우동 면의 미친 식감이다.
다음 에피소드에서도 난 우동을 먹고 있을테지만, 아마 난 이제 한국의 일식집에서는 우동을 먹지 못 할 것 같다.
그리고 한 겨울의 어느 날 우동이 너무나도 먹고 싶을 때, 나는 훌쩍 다카마쓰를 왕복으로 다녀올지도 모른다.
호텔로 다시 걸어서 돌아가는 길.
시간이 늦지 않은 저녁이었지만, 이날 밤은 굳이 술을 찾지 않기로 했다.
마쓰야마에서 목욕도 하고, 메이지 시대를 상상하게 하는 옛 거리를 구경해 보기도 하고, 수건도 사고,
호빵맨 열차를 타고 돌아와서 시원한 고호비 메론 프라푸치노에 따뜻한 역전우동까지. 꽉 찬 하루를 보냈다.
군것질을 좋아하는 동생에게 가져다 줄 오미야게가 귀여워 사진으로 남겨보고서는.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잘 먹어 놓고도 또 음식 프로그램을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