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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Dec 31. 2022

<무도회>

긴 말 필요 없는 단편의 백미

   <무도회>를 읽고 좋은 단편이란 어떤 것인지 한참 동안 생각했다. 짧은 글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 분량 안에서 담아낼 수 있는 것을 충실히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려면 인물과 사건의 특징적인 면만 골라서 부각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편이 효과적일 것이다. 작가마다 스타일이 달라서 체호프처럼 인물과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모파상처럼 사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무도회>의 작가는 후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무도회> 단편에서 캉프씨 부부가 무도회를 열기 위해 나누는 대화는 전형적인 졸부의 모습이다. 두 부부를 관찰하고 그 사이를 파고드는 화자는 딸인 앙투아네트이다. 열네 살인 앙투아네트에게는 갑자기 부자가 된 부모의 욕망과 상관없이 사춘기 소녀의 욕망이 가장 중요하다. 단출한 세 식구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충돌은 사춘기 소녀의 승리로 끝난다. 


   “모든 걸 뒤엎어버리고 싶은, 못된 짓을 저지르고 싶은 거센 욕구”가 허영심에 가득 찬 엄마의 욕망을 무너뜨린다. 엉망이 된 무도회로 울고 있는 엄마를 보면서 앙투아네트는 생각한다. “어른들 역시 금방 지나가버리는 하찮은 일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걸까?” 절망감으로 우는 엄마를 위로하는 손길을 내미는 앙투아네트는 이제 더 이상 사춘기 소녀이자 딸의 위치에 있지 않다. 그 미묘한 변화를 잘 감지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바로 그 순간,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찰나의 순간, 한 사람은 올라갔고, 또 한 사람은 어둠 속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그렇게 ‘삶의 길 위에서’ 엇갈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른 젊은 여자>는 짧은 분량 안에서 놀랍도록 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인간의 모습이 또한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과 맞닿아 있다는 것도 역시나 함께 보여주고 있다. 전쟁 상황에서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준 여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그 사람은 “수시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툭하면 토라지고, 버럭 화를 내고, 생쥐를 무서워할 것 같은 평범한 젊은 여자.”일뿐이다. 그런 여자의 모습을 확인한 화자인 질베르트는 자신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힘을 얻는다. 


    <로즈 씨 이야기>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독신인 로즈 씨가 전쟁으로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재치 있게 잘 보여주는 단편이다. 로즈 씨의 가치관과 낭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해 가는데 그의 태도와 대비되도록 잘 보여주는 인물인 마르크를 잘 배치해서 로즈 씨라는 인물의 특징을 더욱 잘 드러내고 있다. 


    <그날 밤>은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3인칭 시점에서 1인칭 시점으로 변화하는데, 이 시점 변화가 절묘하다. 세 여자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잘 담아낼 수 있는 적절한 화자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네 명의 여자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결혼해서 딸을 데리고 나타난 카미유를 제외하고는 알베르트, 블랑슈, 마르셀 모두 미혼이다. 기혼인 카미유가 결혼생활에 실패해서 나타난 것이니 이야기는 싱글 생활의 편안함을 칭송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그 정도로 그치면 이렌 네미롭스키가 아닐 것이다. 이 작가의 날카로움은 어느새 카미유가 경험한 “날 것 그대로의 삶”에 가닿아서 미혼의 평화로운 삶과 대비시킨다. 미혼의 세 여성 또한 아마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모른척하고 살아왔을 뿐. 그래서 마지막 대사가 마음에 남는다. “언니는 이 모든 걸 우리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말았어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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