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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Jan 14. 2023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작가가 자신의 삶을 집대성하고 싶을 때

   이미 성공을 맛본 데다, 성공한 작품을 이력으로 돈벌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꾸준히 글쓰기에 매진해 온 작가라면 자신이 평생 이뤄온 업적이나 문학에 대해 죽기 전에 갈무리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신나게 평가하고 분석하고, 서가에 오래도록 남겨두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만드는 것과는 다른 것이므로, -평생 실재에 대한 의미를 만들어온 작가에게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쿳시가 만든 자신의 분신이며, 작가가 여러 번에 걸쳐 강연을 했던 것, 자신의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을 대신 말해주는 인물이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이 책이 소설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작가의 강연을 소설의 형식으로 묶어놓은 이 책은 과연 소설인가, 아닌가. 


   작가의 입을 빌려서 말을 한다면, “픽션에서 제일 중요한 게 그거 아닌가요. 픽션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빼내서 타자의 삶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 소설에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빼내서 엘리자베스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엘리자베스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데 그 짙은 개별성, 타자와의 구분이 명백한 작가의 자아가 우리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작가가 만든 픽션에 대한 정의에조차 모순되는 소설이다. 작가는 리얼리즘에 대한 탁월한 의견과 소설에 대한 비관적이며 현실적 전망을 내놓는데, 소설에 대한 그의 사유에 동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작가의 사유에 동의하는 문제와 소설적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별개라는 것이 문제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은, 그동안 충분한 역량을 보여준 작가인 만큼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쟁점적으로 다가간다. 시대를 앞서간 동물권에 대한 성찰과 악의 재현의 문제로 대두되는 문학의 윤리성, 문학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의 문제 등은 일부러 작가가 헐겁게 풀어놓은 논거들을 통해서 독자들을 오히려 더 끌어당긴다. 그래서 분명히 까다롭게 철학적으로 풀어내야만 할 것 같은 주제들을 독자들은 소설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게 된다. 이런 특성을 매력적이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국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학이 작가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로 수렴된다. “신탁받은 이의 은밀한 세계”였던 작가의 삶에 대한 부정, 이매뉴얼 에구두의 아프리카 문학에 대한 강연으로부터 추론된 문학의 현재적 위치, 즉 팔리기 위한 문학, 시장에서 유효한 문학, 그에 동의하기 힘들거나 혹은 그런 문학의 위치를 인정하기 힘든 작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누렸던 작가의 위치를 내려놓지 못하는 태도 등으로 미루어봤을 때 전체적으로 확고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무엇에든 유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자신이 “계시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점을 확인할 뿐이다. 


   쿳시는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이미 소설의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던 작가인데, 하고 싶은 말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아있었지만 그걸 담을 그릇을 찾기에는 이미 노쇠한 것일까 아니면 소설의 미래가 그저 이런 것이라고 직접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인상적인 문장 몇 개


36. 픽션에서 제일 중요한 게 그거 아닌가요. 픽션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빼내서 타자의 삶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는 것? 

108. 우리가 다른 이의 존재 속으로 생각해 들어갈 수 있는 범위는 무한합니다. 공감적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123. 생각한다는 게 뭘까, 이해한다는 게 뭘까 자꾸 묻게 되더군요. 우리는 정말 동물들보다 우주를 더 잘 이해할까요?

212. 이제 그녀는 사람들이 자기가 읽는 것으로 인해 더 나아진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아가 영혼의 더 어두운 영역을 탐색하러 들어가는 작가들이 늘 멀쩡한 상태로 돌아온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읽고 싶은 걸 읽는 것도 그렇지만 쓰고 싶은 걸 쓰는 것이 그 자체로 좋은 일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289. 그때 당신은 자신의 직업을 ‘보이지 않는 것의 서기’라고 했고,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좋은 서기는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직무에 부적합합니다.’ 조금 뒤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믿음이 있지만 그것을 믿지는 않습니다,’ ... 오늘의 심리에서 당신은 개구리에 대한 믿음, 더 정확히 말하면 한 개구리의 삶의 알레고리적 의미에 대한 믿음을 증언합니다. ... 서기 이야기는 포기하고, 창조에 대한 믿음의 확고함에 기초한 새로운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까?“

291. 내가 삶을 다시 산다면 다른 식으로 살 거야. 더 즐기면서. 이제 최종 검증의 단계에 이르러서 볼 때 이 글쟁이의 삶이 내게 어떤 점에서 유익했던가?

300. 우리는 계시에 적합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나도, 나의 필립, 당신도, 태양을 응시하는 것처럼 눈을 그을리는 계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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