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콜하스>

입체적 인물이 가득한 고전을 만나고 싶다면

by 초콜릿책방지기

고전 소설은 오랜만이었는데, 더군다나 술술 읽히는 소설은 최근 들어 읽은 적이 없었다. 대체로 책을 빨리 읽는 편이지만 <미하엘 콜하스>는 몹시 피곤해서 자기 전에 잠깐 몇 페이지 정도 읽다 잘 요량으로 손에 들어도 단편 하나 정도는 무난하게 읽고 잠들 수 있었다. 인물의 이름과 지명이 낯설긴 했지만 그 장애물만 걷어내고 나면 어딘가 친숙한 이야기들이었고 허구적 서사의 재미를 충분히 선사해주고 있는 소설이다.


KakaoTalk_20210306_155932351.jpg


다만 이것이 19세기 초반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시의 소설들과 비교해봤을 때 이 작품집이 보다 복합적인 인간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낸 놀라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뒤를 예상하게 마련인데, 이 작품집의 소설들은 언제나 예상을 조금씩 빗나가 있기 때문이다. 예상을 빗나간 약간의 반전들로 재미를 주는 이 소설들이 당대에 그만한 인정을 받기 힘들었던 이유는 예민한 감성과 반골 기질을 가진 작가가 당대 풍습에 대한 비판적인 혜안을 보여주기 때문에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표제작인 '미하엘 콜하스'에서 보면 주인공인 콜하스는 정의를 추구하면서 영웅이 되길 원치 않는다. 사실 부패한 권력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인물들은 어느 순간 영웅적 모습을 보여주거나 영웅이 되어 있기 마련인데, 콜하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민으로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지금 입장에서 봐도 공감하기가 더 쉬운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불의에 저항해 일어난 시민이 성공적인 영웅이 되어 있는 것은 얼마나 비현실적 판타지에 가까운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발표 당시부터 큰 물의를 일으켰다는 'O. 후작 부인'의 경우를 봐도 "바른 행실로 이름 높은 귀부인"이 자신도 모르는 새 아이를 가지게 되어서 그 아이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광고를 낸다는 이야기 자체가 가부장적 권위가 강력했던 당대 뿐 아니라 지금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사실 성폭행범에 불과한 백작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후작 부인의 태도 변화가 그 우려를 불식시키고 있다. 후작 부인의 태도를 통해서 작가는 백작의 잘못을 욕망에 눈이 멀어서 한 순간 저지른 실수라고 쉽게 덮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금의 사법제도보다 더 낫다는 생각조차 하게 만든다.


이 작품집에 실린 다른 작품들도 모두 예상을 조금씩 벗어난 전개,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필연성과는 동떨어진 결말,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게 넘나드는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 혹은 인간사가 통상적인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을뿐더러 처음과 중간과 끝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은데, 우리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이야기에서는 어떤 필연성을 항상 기대해왔다. 아마도 현실이 필연성을 배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믿고 싶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욕망하고 읽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그런 이야기에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생각이 많고 도달하고 싶은 곳이 높았던 작가였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이 작가가 살던 당시에는 그리 인기가 있었을 리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가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가끔 서사의 재미를 느끼며 인간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싶을 때 이 작가의 책을 읽게 될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삶의 한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