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 열차(2일 차) 마리나 아줌마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함께한 마리나 아줌마. 아내가 배 아플 때 과감히 바디랭귀지 의사소통을 시도하며 횡단 열차 반상회를 이끌어 낸 장본인. 아줌마는 아내의 맞은편 침대에 머물고 있다. 같이 과자도 나눠먹고 과일도 나눠먹는 동지가 된 지 오래, 여러 가지로 고마운 마음에 우리가 사 온 컵라면을 아줌마에게 선물했다. 역시 라면의 참맛을 아시는지 무척이나 고마워하신다.
아내가 배가 아파 약을 먹고 잠든 사이 나를 쳐다보시며 슬그머니 살구 몇 알을 꺼내놓으시는 아줌마. 설마 이게 덫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아무 경계 없이 아줌마에게 아 아니 살구에게 다가간 다. 아이코 걸려들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엄마들의 장기인 수다 한마당. 아줌마는 대접한 살구를 핑계 삼아 여러 장의 사진을 꺼내며 아들과 손주 자랑을 시작하셨다. 진득한 러시아 말과 함께 손주 사진을 내밀며 함박미소를 짓는 아줌마. 이건 최소 30분 이상짜리인데 아줌마 기를 살려드리기 위해서라도 거부할 수 없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도 흔한 장면이기 때문에 아줌마의 의도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대충 해석을 해보면 이런 것 같다.
아들과 손주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마리나 아줌마는 기차를 타고 3일이나 가야 하는 거리를 무릅쓰고 이들을 보기 위한 여행을 다녀오는 중이시다. 아줌마는 아들이 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일 정도 떨어진(울란우데나 바이칼 호수 근처이신 것 같다.) 한 시골마을에서 지내고 계시는데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외로운 마음에 유일한 낙이 아들네에 가서 손주를 보는 거라는 마리나 아줌마.
“아줌마 죄송하지만 애기 엄마, 혹시 그… 며느리는 어디 있어요?”
번역기와 바디랭귀지를 동원해가며 공부하듯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어느새 아줌마의 이야기에 몰입해 버렸다. 사진에 보이지 않는 며느리 타령을 한 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지 말까 했지만 그래도 물어봤다.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빠진 아줌마. 곧이어 작은 목소리로 입을 떼셨다. 어차피 못 알아듣기 때문에 작게 말해도 나는 상관이 없다. 곰곰이 듣고 해석해보건대 이 말인 것 같다.
아들과 며느리가 화목하게 잘 지냈지만, 성격차이로 자주 다투고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며느리는 집을 나갔고 아들이 혼자 손주를 키우는 게 마음이 아파서 이렇게 한번 다녀오면 눈에 밟혀서 눈물이 자꾸 난다는 아줌마. 사진을 한 장 한 장 짚어가며 이야기를 하시는데 괜히 미안하고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아줌마 눈가가 살짝 촉촉해 지시는 것 같았다.
‘에휴 바보같이 괜히 물어봐가지고 아줌마 맘 아프시게 말이야…’
본인의 아픔보다 자식의 아픔을 더 먼저 생각하는 것. 자식이 아프면 본인은 찢어지는 아픔을 겪는 사람. 그게 바로 이 세상의 어머니 들일 것이다. 중학교 시절 아빠가 큰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신 후, 새벽에 나가 식당일을 하게 된 엄마가 생각이 났다. 그렇게 시작한 엄마의 사회생활은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그런 엄마만 생각하면 가만있다가도 눈물이 난다. 하지만 오히려 엄마는 본인의 힘든 점을 애써 감추고 아내랑 이쁘게 살아라며 나를 걱정하곤 한다.
“그럼 손자는 이름이 뭐예요?”
더 생각하면 심란해질 것 같아서 급히 화제를 돌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주 이야기에 마리나 아줌마도 금방 원기회복. 다시 손주바보의 모습으로 수다를 이어가신다.
보랏빛소가 온다 라는 책이 있다. 마케팅 관련 책인데. 사람들은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금방 무료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도로가에 젖소가 널려있어도 처음에만 신기하지 금방 지루해지고 그중에 보랏빛 소라도 나타나야 새로운 관심이 생긴다는 것. 그래서 지속적으로 보랏빛 소 같은 자극을 만들어 내는 게 마케팅 전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횡단 열차가 매력적이라고 해도 날씨도 후덥지근하고 반복되는 열차 내 일상이 뭔가 무료해지기도 했는데 아줌마의 이야기를 듣는 게 재미있다. 이러다가 나이 들면 동네 할머니들하고 수다 떠는 할아버지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일어났다. 아줌마는 옳거니 잘됐다는 듯이 슬그머니 살구를 꺼내신다. 이번엔 아내 차례다.
“여보, 마리나 아줌마가 당신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데.”
나는 입가에 실미소를 품고 슬그머니 일어나며 아내를 부른다. 이제 그만 아줌마와의 긴 대화에서 빠질 찬스 아니 시간이었다. 하하. 양보하는 것이다. 아내를 위해서 말이다. 나는 이미 많은 걸 알고 있고, 아줌마의 이야기는 신선해야 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