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버려야 한다
그림 - 김주희 작가님의 <남아있는 나>
선인장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선인장에게 물을 듬뿍 주면, 선인장은 썩거나 죽어버리고 만다.
물을 듬뿍 주어야 하는 식물도 있을 테지만, 선인장은 수분을 저장하기 때문에 많은 물은 마치 독약과도 같다.
그러나 선인장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자기 생각대로 물을 주는 이는 자신이 사랑을 주었는데 자기 마음도 모르고 죽어버렸다며 선인장을 원망할 수도 있다.
다른 식물도 마찬가지이다. 식물들에게는 물을 많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물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식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물을 주지 않을 때도 있다.
전자는 "내가 생각하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고, 후자는 "상대가 생각하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그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을 듬뿍 주는 선생님이었다.
그래 놓고 내가 기대하지 않은 아이들의 반응에 서운해지기 일쑤였다. 내가 이만큼 물을 주면 이만큼 자라야 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마음수련 명상이 궁금했던 까닭도, 끝까지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까닭도, 다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첫번째로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포용할 수 있는 보다 넓은 마음이 욕심 났고, 두번째로는 아이들도 자신의 마음을 버릴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런 나를 내심 기특해 했다.
흔하디 흔한 마음수련 명상 체험담에서 사람들이 "이제껏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았었는데 마음수련 명상을 끝까지 하고 나니 남을 위해서 살게 되었다"라고 고백할 때,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치켜 세우며 이미 남을 위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나도 결국은 모두가 이야기하던 "나만을 위해 살고 있는" 내 실체를 직면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 이중적인 내 마음의 실체를 인정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나만 볼 수 있는 내 마음의 밑바닥에는, 남을 위하는 마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오직 내가 잘나려는 마음뿐이었다.
아이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사랑하는 착한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너무 적나라하게 보이니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에 없던 끈기를 발휘해서 도망치지 않고 계속 방법대로 따라 하다보니, 그것을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끔찍한 내 모습이 정말로 버려졌다.
진짜가 아닌 가짜라서 버릴 수 있다는 데 안도했다.
더 이상 가짜가 하는 생각에 속지 않기로 했다. 가짜에 가려서 진짜가 안 보이는 것이다. 진짜는 있는 것이고 가짜는 없는 것이라서 세상에는 원래 진짜밖에 없다.
나라고 믿고 살았던 내 마음이 가짜였음을 알고 죄다 버리고 나니, 나는 없고 세상만 있었다.
세상에는 너와 나도 없고 모두가 그냥 하나다. 내가 아닌 세상의 입장에서 보니 아름답지 않은 존재가 없다. 모든 순간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할 필요도 없이, 세상 자체가 참사랑이었다. 세상만한 마음으로 상대를 품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참사랑이다.
나를 드러내며 상대를 위해서 뭔가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세상이 나를 데려다 놓는 곳에서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
함께 하는 인연들과 함께 행복한 것.
그냥, 그게 다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정말 많이 버렸다. 가짜인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이들 행동에 전처럼 속상해지지도 않고 아이들이 내 마음을 몰라주어도 괜찮다.
그러나 어제, 내가 특별히 신경쓰고 있던 아이들을 위해서 준비한 수업에 막상 들어가려니 갑자기 망설여졌다.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크고 많았는지, 나는 아직도 아이들을 덜 버렸다는 것을 느꼈다.
마음에 아이들을 담고 있는 만큼, 아이들도 내 마음을 알아주길 기대하고 있어서 거부 당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나의 걱정과 염려에 대해서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는 교감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무심코 내가 느낀 것을 말씀드렸다.
나는 내가 마음수련 명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버린다'는 표현을 썼던 것이었는데, 뜻밖에 내 말이 끝나자마자 교감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을 마음에서 버려야 하는 이유를 바로 답으로 주셨다.
경력이 지극하신 선생님들께서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과 함께였다.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에서 아이들을 놓아야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주옥 같은 말씀들에 힘을 얻으며 교감선생님이 참 멋지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머릿속에 뜨는 생각들과 내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아이들에 대한 생각들을 마음빼기 명상 방법대로 시원하게 빼기(-)하고, 다시 열심히 수업을 준비했다.
그래,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내 마음 속에 갇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에서 벗어나서 보지 않으면, 아이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가 않는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의 장난.
사랑하니까, 나는 아이들을 버린다.
내가 사진 찍어 내 마음 속에 담아둔 그 아이들은 진짜가 아니다. 오히려 진짜를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가짜이다.
그러니 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마음에 찍혀 있는 하루하루를 버리면 좋은 점은 다음 날 같은 아이가 같은 행동으로 잘못을 저질러도 딱 오늘의 것만큼만 화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마음수련 명상을 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 차곡차곡 쌓여서, 작은 일에도 곱절로 화가 났었다.
지금은 내 감정에 못 이기는 일이 없으니 후회하고 미안한 순간들이 이어지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다.
내 마음의 노예가 아닌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기.
가짜로 살지 않고 진짜로 사는 일, 참 중요하다.
저는 참 이기적인 사랑을 했습니다.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었을 뿐이면서 상대를 위해서 줬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가 더 큰 까닭은, 그만큼 내 마음에 그들의 지분이 많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참 모순되고 슬픈 일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에서 버려야 합니다. 놀랍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마음을 비운 자리에 저절로 드러납니다.
청소년 명상캠프에도 가 보았는데, 아이들의 문제 행동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에 의해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온 가족이 명상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더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부모님이 먼저 명상을 하시는 것이 낫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문제 아이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부모님을 탓하는 말이 아니라 부모가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희망적인 의미로 들으셨으면 합니다. 혹여 자녀 교육 문제로 고민을 하신다면, 아이에게 변화를 강요하기보다 부모님이 먼저 마음수련 명상을 해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언제나 모든 부모님들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께서 아이들을 생각하시는 만큼, 마음 속에 있는 그 아이들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만 인식하면 부모님들이야 말로 마음수련 명상을 누구보다 잘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경험상으로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강한 동기가 이 명상을 끝까지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무시할 수 없는 원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마저 이중적인 마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더 쉽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명상하세요. 돌아봐야 할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매거진 <나를 돌아보다>는 마음수련 명상으로 저를 돌아보며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기록하는 공간입니다. 부끄러운 자기 고백이자 저만의 이야기입니다. 마음수련 명상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돌아본 마음을 버리는 방법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알게 되는 것과 겪게 되는 변화도 다 다릅니다. 단지 제가 명상을 해오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저도 마음수련 명상을 하고 계시는 분들에게 힘이 되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참고로 마음수련은 기억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된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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