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편집자의 취향 확립 프로젝트
뜨겁게 데워진 뚝배기 안에 한 가득 담긴 순대국이 보글거린다.
시야마저 흐리게 김을 뿜어내는 국물에 숟가락을 넣어 뒤적여본다.
다대기(양념장)를 넣을지 고민하다가 이내 마음을 접고 우선 국물부터 크게 한 숟갈 떠서 목구멍으로 넘긴다.
목구멍부터 가슴 속까지 뜨끈해지며 크으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제야 함께 나온 은색깔 밥그릇의 뚜껑을 열고 밥 한 술을 크게 떠서 뚝배기에 담근다.
소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고 따르자마자 한 번에 들이삼킨 뒤, 국물과 밥을 떠서 양볼 가득을 채운다.
그래, 오늘은 취해야겠다.
애주가 부모님 밑에서 자란 탓에 순대국을 한 평생 먹어왔다.
동네 시장 순대국, 프랜차이즈 순대국, 근방에서 이름 난 순대국.
먹어온 세월만큼 순대국 빅데이터도 꽤 쌓였다.
아, 여기는 순대가 특히 맛있네. 여긴 국물이 죽인다. 이 집은 다대기 넣고 얼큰하게 먹는 게 더 맛있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는 데이터에 나만의 한줄 평을 얹으니 그게 곧 내 순대국 취향이 되었다.
순대국이 싫었던 적도, 왜 좋아하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으니 내게 순대국과 함께한 그 기나긴 시간은 오롯이 '어떤' 순대국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먹는 걸 좋아하는지 그 취향을 다듬는 과정이었다.
국물 자체가 맛있는 순대국이 좋다. 그래서 다대기를 처음부터 넣지 않고 1/3쯤을 먹고서야 다대기를 넣는다.
순대국에 들깨가루를 뿌리는 건 싫다. 왜인지 텁텁해지는 느낌이랄까.
머릿고기보다 순대가 많이 들어간 순대국이 좋다. 이름부터 순대국이잖아!
그렇게 나만의 취향까지 만들어 가며 어디 가서 순대국 이야기로 밀리지 않는다 자부해온 인생이었는데,
21살에 만난 남자 친구는 나보다 더한 순대국 덕후였다.
매일같이 순대국을 먹어도 안질린다며 대학교 근처의 순대국집을 혼자서도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한창 흘러 넘칠 때도, 서로의 마음이 미지근해졌을 때도 데이트 코스는 항상 순대국집이었다.
순대국을 하나씩 놓고 술 한 병을 시키며 밤이 늦어지도록
술 한 잔에 사랑과, 국물 한 숟갈에 용서와, 순대 한 점에 마음을 담아 삼켰다.
순대국 국물에 서운함은 풀어지고 뜨는 한 숟갈에 애정은 채워졌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먹으니 좋았다.
아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좋아하니 좋았다.
이 사람과 미우나 고우나 가난하나 부유하나 상관없이 순대국 한 그릇 놓고 시시껄렁하지만 서로에겐 더 없이 소중한 이야기를 평생 나누는 것도 꽤 괜찮은 미래겠다 생각했다.
결혼하던 날, 남편은 혼인 서약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국팔도 순대국 맛집 깨기만큼은 꼭 해주겠습니다."
어느 덧 만난지 10년이란 세월을 꼬박 채우고 앞으로 남은 날들도 같이 잘 살아보겠다 말하는 자리에서 이 남자는 또 순대국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순간 그와 함께할 미래가 입 안에 남는 맛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순대국 한 그릇을 두고 이야기 나눠오던 과거에, 미래의 우리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앞으로도 나는 순대국을 계속 좋아하겠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 먹을테니.
이제 순대국은 내 생에 남은 날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음식이 될 것이다.
그와 함께하는 내 순대국 취향은 앞으로 얼마나 더 뾰족하고 단단해질까?
그래, 오늘 저녁은 순대국에 소주 한 잔해야겠다.
가장 추천하는 순대국집은 속초 아바이 마을의 단천 식당.
서울에서 가장 추천하는 순대국집은 농민 백암 순대.
초보자도 무난히 즐기기 좋은 순대국집은 청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