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빵: 네가 그리울 ‘만두’
어제는 비가 내렸어 너도 알고 있는지
돌아선 그 골목에선 눈물이
언제나 힘들어하던 너를 바라보면서
이미 이별을 예감할 수가 있었어
너에겐 너무 모자란 나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떠나는 널 나는 잡을 수 없는 거야
넌 이제 떠나지만 너의 뒤에 서 있을 거야
조금은 멀리 떨어져서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게
이제 떠나는 길에 힘들고 지쳐 쓰러질 때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나에게 안기어 쉴 수 있게
너의 뒤에서
이 노래는 집 앞 손만두집 찜기 뒤에서 한 40대 여성이 만두와의 이별에 절망하며 눈물 반, 공기 반으로 불러본 닿을 수 없는 세레나데입니다. (곡명: 너의 뒤에서 / 박진영)
모락모락. 뭉게뭉게.
집 앞 손만두집 찜기가 내뿜는 하얀 열기가 요 며칠 자꾸만 눈길을 사로잡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일까? 만두집 앞을 지날 때마다 두툼하고 말랑한 밀가루 반죽에 육즙 가득 품은 고기만두가 자꾸만 손짓을 한다.
"만두야, 그러지 마.
너에겐 너무 모자란 나란 걸 알고 있잖아? “
겨울. 만두 먹기 딱 좋은 계절이 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호호 불어가며 "아뜨뜨, 아뜨거", 입김과 탄성을 곁들여 즐기기 얼마나 좋은 계절인가! 뜨끈한 만둣국 한 그릇이면 내복을 껴입은 듯 든든하고, 만두집 찜기가 뿜어내는 뽀얀 수증기는 삭만 한 겨울 도시 풍경에 푸근한 부뚜막의 정취를 끌어와 온기를 더한다.
그러나 어느덧 세 달째다. 내 속이 만두를 거부한 지. 그날, 그러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만두를 먹었던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석 달 전 그날로 기억을 되감아 보자.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더부룩했다. 애꿎은 물컵만 분주하게 들었다 놨다, 꿀꺽꿀꺽 물을 삼켜 억지로 내려보려 하지만 꽉 막힌 속은 물 마저 밀어내는 듯했다. 결국 소화제를 털어 넣었다. 그러나 소화제만으로는 택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집 밖으로 나가 아파트 단지 안을 보폭을 크게 해서 세 바퀴 걸었다. 걷는 동안 속이 좀 나아지는가 싶었지만 결국 이날의 소화 불량은 저녁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들더니 다음날 저녁까지도 이어졌다. 2박 3일을 꼬박 부대끼고 나서야 내 속은 다시 편하게 음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대체 뭘 먹었길래 그러냐고?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니냐고? 억울하다. 고작 만두 8개. 오전 내내 바쁜 일정으로 공복을 유지하다 오후 수업 하나 마치고 너무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은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만두 8개라니, 너무 많잖아요....”
라며 혀를 내두른 당신. 그런 라면집에 김치 없고, 만둣집에 단무지 없는 섭섭한 소리 마셔요. 만두 12개쯤 본식 전에 애피타이저로 거뜬히 먹던 저라고요. 흑흑. 결국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세 달이 넘도록 만두를 먹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대로 영영 만두를 잃어야만 하는 걸까. 게다가 지금은 겨울. 다시 말하지만, 만두 먹기 딱 좋은 계절인데?
빵 매거진 두 번째 주제로 '겨울 하면 생각나는 빵'에 대해 써보자고 했을 때 붕어빵, 호빵, 호떡을 모두 재치고 곧바로 만두를 떠올렸을 만큼 나에게 만두는 따뜻한 겨울의 빵이다. (그렇다고 겨울에만 만두를 먹은 것은 아님을 고백합니다. 좋아하는 빵 먹는데 따로 때가 있나요, 어디) 만두는 만두고, 빵은 빵이지 만두가 어떻게 빵이 될 수 있냐는 당신을 위해 잠시 만두와 빵의 공통점을 짚어보고 넘어가자.
하나, 만두피와 빵 모두 밀가루로 만들어진다. 다양한 반죽 방식과 재료 배합으로 다른 식감을 만들어 낸다는 점도 비슷하다.
둘, 반죽과 발효 과정을 거친다. 빵과 만두 모두 밀가루와 물을 기본으로 반죽을 해 치대고 모양을 낸다. 빵이 발효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만두도 반죽을 숙성시켜 만두피에 찰기를 더한다.
셋, 다양한 속재료가 들어간다. 빵 속에 크림, 팥, 잼 등을 넣는 것처럼 만두에도 고기, 야채, 해산물, 김치 등 다양한 속이 들어간다. 속을 통해 지역별, 문화별 특색이 드러나는 점도 서로 닮아있다.
넷, 찌고 굽고 튀기는 요리 방식을 이용한다. 모양과 속재료는 달라도 찌고, 굽고, 튀겨서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요리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맛과 식감 또한 두 음식의 교집합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의 겨울 빵이자 겨울철 최애 간식은 만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만두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몸이 만두를 거부했다는 것은 조만간 빵마저 밀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닐까? 4n 년 가까이 열심히 일해온 위가 더 이상은 밀가루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파업을 선언한다면 말이다. 빵과 만두 없는 삶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다크 서클이 짙어지고 모골이 송연해진다. 뭉크의 절규 속 주인공처럼 처절하게 절망하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상상이 현실이 되게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다. 이대로 나의 겨울 간식을 떠나보낼 수는 없다. 세상에, 죽어도 못 보내. 내가 어떻게 널 보내. 군만두, 튀김만두, 찐만두, 물만두, 왕만두, 비빔만두, 만둣국, 떡만둣국, 탕수 만두.... 얘들아, 가지 마. 내가 잘할게.
나는 다시 만두를 먹어야겠다. 만두와 재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은 만두를 소화시키기 어려워진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원인을 알아야 해결책도 나오는 법. 다시금 그날로 돌아가 내 몸이 만두를 거부한 이유를 찾아보자.
1. 오랜 공복으로 휴업 상태였던 위에 노크도 하지 않고 만두를 들이밀었다. 그날의 첫 식사 시간은 오후 4시. 전날 저녁 7시에 마지막 식사를 마쳤으니 20시간 넘게 공복이었던 셈이다. 내 위는 물과 뜨아만을 공급받으며 따뜻하고 부드러운 일용한 양식의 재방문을 기다리고 있었을 터. 그런 위에게 노크도 예고편도 없이 냉동실에서 잠자던 왕교자 여덟 개를 투척하고 말았으니.....
2. 만두는 의외로 짜고 기름진 음식이다. 내 마지막 만두였던 비비고 왕교자의 성분표를 살펴보니 315g 한 봉지를 다 먹을 경우 총칼로리는 630kcal, 나트륨 1,140mg(57%), 지방 32g(50%), 포화지방 10g(67%)를 섭취하게 된다. (1일 영양성분 기준치 비율/%) 와우. 어쩐지. 육즙이 참 풍부하고 기름진 것이 다 먹고 나니 입술이 번들번들하더라.
3. 허겁지겁, 씹는 둥 마는 둥 만두를 마셨다. 그래, 마셨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수업과 수업 사이에 빨리 먹어 치울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해서 고른 메뉴였다. 천천히 꼭꼭 씹어 맛을 음미하기보다는 빠르게, 대충 씹어 마시듯이 삼켰다. 네가 내 마지막 만두인 줄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너를 그렇게 게눈 감추듯 보내버리진 않았을 텐데.
4. 인스턴트식품은 위 건강에 해롭다. 냉동 만두는 대표적인 인스턴트식품이다. 인공 감미료, 방부제, 향료, 색소, 산화 방지제.... 인스턴트식품에는 이름만 들어도 건강에 안 좋을 것 같은 화학성분이 잔뜩 들어있다. 이러한 첨가물은 알레르기 반응, 소화 장애, 암 위험 증가, 호르몬 장애 등 다양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5.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의 습격. 만두 사건 얼마 후 받았던 검강검진에서 나는 위내시경 중 조직검사를 하게 되었다. 추석 연휴 이후 받아 든 조직검사 결과는 '만성 위염, 헬리코박터균 치료 요함'.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 감염이란 위벽의 염증과 위나 장의 궤양을 유발하는 박테리아 감염을 말한다. 주요 증상은 상복부 통증, 소화불량, 복부 불편(가스가 찬 느낌, 팽만감 또는 작열감)이다. 잡았다, 요놈! 너였구나. 내 오랜 소화불량의 원인.
다섯 가지 원인 중 5번, 헬리코박터균은 다행히 2주간의 항생제 복용으로 깨끗이 물리쳤다. 그 후로 수시로 나를 괴롭히던 소화불량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고맙다, 현대의학이여. 1번의 해결을 위해서 아무리 바빠도 공복 시간은 가능한 14~16시간 이상을 넘기지 않으려고 신경 쓴다. 또한 식사 전에 가급적 야채를 먼저 먹고 단백질, 탄수화물 순서로 먹는 거꾸로 식사법을 실천하려고 노력 중이다. 3번 허겁지겁 이슈의 경우 30번 씹기와 식사 중간중간 젓가락 내려놓기 운동을 실천하며 고쳐가는 중이다. 문제는 2번, 4번인데 인스턴트식품 멀리하기를 의식하면서 개선되는가 싶다가 최근 다시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이슈로 즐기지 않던 라면을 찾게 되면서 적신호가 켜진 상태다. 이는 라면 쇼핑 금지 운동을 통해 강제적으로 해결할 계획이다.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꾸준한 노력뿐이다.
세상에 나쁜 빵은 없다. 빵과 만두는 죄가 없다.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위를 얼마나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일 뿐. 그래도 만약 다시 만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면, 그때는 인스턴트 냉동만두가 아닌 내가 직접 빚은 손만두로 먹어보려 한다. 우리밀로 만든 만두피를 사서 고기 대신 두부와 숙주 그리고 부추를 듬뿍 넣고 정성껏 빚으리라. 하나하나 빚은 만두를 깨끗한 면포를 깐 스테인리스 찜기에 먹기 좋게 쪄낸 다음 뜨거운 김 식기 전에 한입 크게 베어 물어야지. 그리고는 왼쪽으로 15번, 오른쪽으로 15번 꼭꼭 씹어 꾸우우울떡 삼킬 테다. 천천히, 오래오래, 나의 겨울빵 만두의 매력을 음미하며. 이 겨울이 가기 전에 만두와의 재회가 가능해지길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