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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선혜 Oct 30. 2022

무명작가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

얼마 전 서울시민대학에서 하는 ‘강사 스쿨’ 수업을 들었다.

글쓰기 강의를 잘하고 싶어서 기술을 배우러 간 거였다. 수강생 중에는 아직 한 번도 강의를 해본 적 없는 분도 계셨고, 이미 십 년 이상 강사로 활동하신 분도 계셨다.



나와 같은 조가 된 남자는 ‘연극배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15년 동안 연기를 하셨다는 데 나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소위 말하는 무명 배우였다. 무명작가와 무명 배우가 한 팀이 된 셈이다.



수업은 5주 동안 진행됐다. 마지막 시간에는 각자 하고 싶은 분야의 강의를 시연해 보기로 했다. ‘무명 배우’의 강의 주제는 ‘긴 대사 잘 외우는 법’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을 배우 지망생이라고 가정하고 한 번 해보겠습니다.”


사실 외모만 보면 배우라는 느낌이 전혀 안 들었다.

그런데 목소리를 듣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오랫동안 연기를 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정적인 발성으로 차분하게 강의를 진행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집중력도 덩달아 흐려졌다. 무명 배우가 연기 노하우를 강의하는 게 별로 와닿지 않았다. 마치 수학 성적이 신통치 않은 친구가 수학 100점 맞는 법을 알려주는 느낌이랄까.



강의가 끝내고 피드백을 하라길래 번쩍 손을 들었다.


“저는 강사님한테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대사를 잘 외우는 방법도 유용하지만, 제가 무명작가라서 그런지 15년씩이나 연기를 계속할 수 있는 강사님의 내면이 더 궁금합니다.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스스로 동기 부여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으실 것 같아요. 그런 걸 주제로 강의를 하시면 더 많은 관객에게 감동을 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처럼 인기 없는 작가로 15년 동안 을 계속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그런데 이 ‘무명 배우’는 그걸 해내신 분이었다. 나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분명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라고 너무나 쉽게 말하지만, 성과도 없고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계속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평범한 ‘무명 배우’가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힘을 지닌 사람’이라고 포지셔닝하길 바랐다.



강의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무명 배우’가 나를 찾아왔다. 눈앞에 하얀 종이를 내밀었다. “이 메일 주소 좀 알려주세요.” 내 말이 정말 도움이 됐다면서 나중에 그런 주제로 강의를 하거나 책을 낼 때 조언을 구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흔쾌히 메일 주소를 써드렸다.



자신을 포지셔닝하는 건 책을 쓰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글감 찾기가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사소한 에피소드에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게 되면 거기에서 나만의 고유한 서사가 생긴다. 만약 ‘무명 배우’가 연기 기술에 대해 강의를 하면, 금방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계속해내는 과정에서 겪은 에피소드와 그를 통해 느낀 좌절, 그리고 극복하는 방법을 써보면 어떨까. 아마 자신만의 서사가 녹아있어서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요즘 글감을 제공하는 글쓰기 강좌가 많다. 수강생들이 자꾸 무얼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글감을 아예 줘버리는가 보다. 나는 강사가 글감을 대신 찾아주는 수업은 도움이 안 된다고 확신한다. 글감은 내 안에서 길어 올려야만 한다. 그래야 고유한 나의 글이 된다.



‘무명작가’인 나는 글 잘 쓰는 법에 대해 떠들 자신이 없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10년 동안 육아만 했던 평범한 주부가 자신의 이름으로 첫 책을 쓰면서 느낀 기쁨과 슬픔, 좌절과 희망이 바로 그것이다. 그걸 통해서 아직 아무런 책도 써본 적 없지만 언젠가 첫 책을 쓰고 싶은 사람, 나처럼 평범한 미래의 저자를 도울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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