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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선혜 Oct 30. 2022

나를 돌보는 글쓰기


“스무 살의 나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하얀 종이를 펼치고 앉아있던 참가자들에게 물었다.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서로 바라보며 웃거나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책을 내고 암 환우를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을 때였다. ‘스무 살의 나’에게 편지를 써보자는 말에 참가자들은 망설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에게, 그것도 스무 살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쓰라니. 막막했을 것이다. 다 쓰고 읽지 않으셔도 된다고. 그저 스무 살의 나를 잠시 만나고 오시라고. 정성이 통했던 걸까. 그제야 하나둘 펜을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와 눈이 자주 마주치던 참가자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정수리만 보인 채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분 남짓 흘렀을까. 참가자들이 하나둘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편지 쓰기를 끝낸 참가자들의 볼은 발그레해졌고,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가 있었다. 처음에 굳어있었던 표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함께 편지를 나눠 주실 분, 계신가요?

이번에는 조심스레 편지를 낭독해줄 것을 권했다. 분홍색 두건을 쓰고 있던 참가자를 시작으로 차례차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생김새가 다르듯 살아온 세월 역시 모두 달랐지만, 편지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누구도 과거의 나를 탓하거나 더 열심히 살았어야 한다고 책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스무 살의 나를 응원해주고 있었다. 



“지금 네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서 속상하겠지만, 너에게 더 멋진 인생이 기다리고 있으니 좌절하지 말아라. 충분히 수고했고, 그만하면 잘했다.”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헤엄치고 파도를 타던 그 여름이 기억이 나는구나. 얼마나 재미있었니? 즐겁게 살아라. 그때 그 바다에서처럼. 매일매일 그저 즐겁게 살아라.”



모두 암을 겪고 있는 환우들이었지만 건강을 위해 술을 끊으라거나 운동을 하라는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편지 속에는 후회와 자책 대신 희망 섞인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가 가득했다. 편지 읽기가 끝나자 발그레해졌던 참가자들의 볼은 더욱 상기되었고, 이내 눈시울마저 붉어졌다.



“스무 살의 나에게 전했던 다정한 말을 지금의 여러분에게도 들려주세요. 

자신을 채찍질하고, 몰아붙이는 대신 잘하고 있다고, 즐겁게 살자고 응원해주세요.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예요. 그러니 스스로 더 많이 아껴주세요. 그 누구에게 듣는 위로의 말보다 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수업을 마치고 나니 몇 년 전 혈액암 진단을 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서른두 살, 아이가 태어난 지 고작 3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린 딸을 키우면서 암과 싸우려니 몸도 지쳤지만, 마음이 더 고통스러웠다. 건강한 친구들은 매일 앞으로 나아가는 데 나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암이 온몸에 퍼지는 상상을 하며 불안에 떨기도 했다. 우울함과 불안함은 억울함으로 바뀌었다.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끊임없이 물음표가 그려졌다. 자꾸만 속이 상해서 암 환자인 것을 잊고 살려고 애쓴 적도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면 스스로 다그쳤다. 언제까지 이렇게 우울해할 거냐고, 그깟 암이 뭐 대수라고 주저앉아있냐고. 



항암치료로 지칠 때면 아무도 내 맘을 몰라주는 것 같았다. 

늘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편도, 나를 낳아준 엄마도 어쩜 이렇게 내 속을 모를까 답답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내 마음은 내가 알아줘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마음을 외면하면서 남에게 알아달라고 하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괴로움에 떨었던 낮과 잠 못 들던 밤을 일기장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는 도공의 심정과 같았달까. 누가 읽든 말든 내 속이 시원해지기 위해서 매일 밤 대나무밭을 찾았다. 



그런데 날마다 글을 쓰다 보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거짓말처럼 불안함과 우울함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세상이 싫고 주변 사람들이 밉기만 했었는데 원망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글쓰기를 계속한 결과, 암이 주인공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걱정되고 불안할 때, 그 마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기 위해 억누르지도 않는다. 그냥 글로 쓴다. 글자로 바뀐 마음을 가만히 읽어본다. 그리고 알아차려 준다. 평가도, 조언도 필요 없다. 그저 내 마음을 받아들인다. 치료를 모두 마치고 완치 판정을 받은 지금도 암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암을 겪은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억지로 내게서 암을 떼어놓으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대신 암을 인생의 그림자라 여기며 함께 살아간다.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다. 어두운 그림자가 아무리 길게 드리워도 결코 나를 앞장서지 못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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