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별이 되었지?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바라본다. 아이들도 함께 별을 바라본다.

by 이작가

출판단지에서 결혼 전 왕성한 솔로 생활을 할 때 나는 내가 세상을 다 가진 줄 알았다. 회사에서 제공해준 오피스텔은 복층에 세련미가 흘렀고, 냉장고에는 자취러의 필수템인 다양한 수입 맥주와 북어 포류, 소시지, 과일들을 쟁여놓곤 했었다. 내 오피스텔은 남편과 싸운 베프에게 아지트가 되어주기도 하고, 형편이 안 좋은 친구의 잠자리가 되어주기도 했다.

갓 뽑은 차는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호기롭게 회사 앞으로 받은 새 차를 어찌어찌 일산 오피스텔의 주차장에 파킹 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할 뿐이다. 그것도 젊은 시절의 치기였겠지. 누가 들으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첫날 주차만 40여분이 걸렸으니 몸소 요리조리 다 해 보다가 터득했다고나 할까. 그러고 나니 이튿날은 조금 수월했다. 오피스텔, 차, 당분간 안 잘릴 것 같은 회사, 친구들... 정말이지 더 바랄 것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더 크게 다가왔을 수도. 겸손하게 살겠다는 다짐이 생긴 건 그 일을 겪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7년 자취생활을 하면서 내가 늘 지키던 나와의 약속이 있었는데, 일요일 아빠와 아점 먹기였다. 장사를 하시는 엄마 덕에 아빠는 혼자 식사하시는 게 습관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특히, 혼자 드시는 일요일 점심은 내가 생각해도 초라해 보였었다. 엄마는 딸인 내가 봐도 무뚝뚝했고, 환하게 웃는 적이 참 드물었다. 아빠와 따뜻하게 대화를 나누었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수심이 가득해 보이고, 늘 피곤해 보였다.


아빠는 전혀 달랐다. 계절마다 바뀌는 바람 소리에 귀를 열고, 좋아하는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읊조릴 줄 아는 감성의 달인이었다. 둘째 딸인 나는 아빠 쪽을 아주 많이 닮은 듯하다. 그래서일까. 조곤조곤 조잘조잘 아빠와 만나면 그렇게 할 얘기가 많았다. 회사 다닐 때 얘기, 사람들에게 배신당했던 이야기, 술 마시며 있었던 이야기, 엄마와 싸웠던 이야기 등 갖가지의 수다를 떨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고, 소주 한 병이 두병으로 늘어나는 건 예사였다. 뜨거운 설렁탕을 데우고 또 데우고 그렇게 설렁탕집을 전세 낸 적도 참 많았다. 나는 숟가락에 깍두기를 척 올려서 소주 한잔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설렁탕을 한 입 입에 넣으며 아빠랑 눈을 마주쳤었다. 그날도 그랬다.


아빠한테 물어보지 못한 것 중에 몇 가지가 있는데, 아빠도 나를 일요일마다 기다리셨을까 하는 것이다. 나는 일요일 아침 아빠와의 일정 때문에 주말에 마음대로 여행을 한 번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저 소박하게 내 오피스텔에서 나의 생활을 즐기고, 일요일 아침은 출근하듯 아빠를 보러 가곤 했다. 일요일 점심부터 대리를 부르곤 했으니, 그것 또한 내 일주일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렸었다.


그날은 아빠가 손가락 사고를 당하신 지 얼마 안 된 날이었다. 바로 이 주 전 아빠와 차 문을 닫는데 아빠가 손을 넣은 채 트렁크 문을 닫아 버리셨다. 나는 너무 놀라서 차마 눈뜨고 볼 용기조차 없었는데, 아빠가 나를 보며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내 손이 거기 있었네."

평소랑 다르게 느려 보이는 아빠가 이상했던 날이었다. 그날도 다친 손을 하고도 아파트가 코 앞인데, 잠시 쉬었다 가자며 내 손을 잡으셨던 아빠.


여느 때처럼 아버지와 일요일 아점을 하고 우리는 늘 하듯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아빠가 말씀하셨다.

"이따 저녁때 볼 건데 뭐. 두부집에서 만나."

"아빠 술 좀 깨게 사우나나 들렀다 와. 나도 가서 정리 좀 하고 두부집으로 갈게요."

오피스텔에 도착해 빨래를 돌리고, 간단히 다음 주 장을 보았다. 친구들이 또 한 번 들이닥친다는 예고가 있었기에 이것저것 쟁여 놓기 위해서였다. 장을 다 보고 집에 들어와 칼칼하게 김치 콩나물국을 끓일 때였다. 엄마가 웬일로 전화를 했다.

"엄마. 가게 안 바빠? 어떻게 전화를..."

"아빠가 쓰러지셨대. 택시기사가 병원에 모시고 갔어. 성심병원으로 얼른 와."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가 오피스텔을 갑갑하게 눌렀다. 팔팔 끓고 있는 콩나물이 시야에서 뿌옇다가 사라졌다.

"아빠가 아무도 못 알아보셔. 와서 너무 놀라지 말고."

들고 있던 국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콩나물 국물이 바닥에 튀고,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겨우겨우 다스려 가스불만 겨우 껐다. 겉옷을 챙겨 입고 저녁거리로 나왔다. 힘 빠진 다리로 겨우 걸음을 걸어 아무 택시나 잡아탔다.


아빠와 나는 좋아하는 음악도 비슷하고 따라 부르는 것도 즐겨했었다. 아바의 음악을 아빠 덕분에 접했고, 나나 무스꾸리, 파바로티 같은 음악 하는 사람들의 이름도 아빠 덕분에 알게 되었다. 내 음악 리스트는 어린 시절 차곡차곡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김도향, 조영남 가수의 노래를 함께 듣고, 아빠 발 위에 올라서 같이 춤도 추었다. 가장 많이 들었던 클래식이 있는데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아빠와 취향이 비슷했었나 보다. 택시를 타고 정신이 들즈음, 귓가에 익숙한 선율이 흘렀다. 파바로티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다. 파바로티가 들고 나오는 하얀 손수건 이야기와, 여러 번 말씀하셨플라시도도밍고와 호세카레라스 까지 늘 알려주시던 아빠가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노래의 절정으로 갈수록 쉴 새 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동안 숨도 아껴가며 노래에 집중했다. 그러면 아빠도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마음속으로 희망하고 또 바랐다. 아빠를 보러 둘째가 달려가고 있는걸 아빠가 제발 알아주기를, 힘겹게 내 손을 잡고 지선아 하고 외쳐주기를.


사람의 인생은 모르는 거야. 아침에 눈뜨고 저녁엔 죽을 수도 있는 거거든. 인생이란.

어느 영화에서 들었던 대사처럼 내 인생은 하루라는 시간에서 일요일 오전과 일요일 오후라는 시간차에 따라 180도 다른 삶이 되어있었다. 오피스텔에 당분간 갈 일도 없었고, 의미없이 세워져 있는 차는 때가 타기 시작하고, 웃고 떠들고 놀던 친구들과의 시간도 다 기억 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에 위안이 되지 못했고,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 같은 불안함, 끝이 보일 듯 말 듯한 아슬아슬함 속에서 버티고 기다리고 기도하던 시간들이 지나갔다.


뇌경색이 크게 온 아빠는 결국 병상 생활 동안 나를 한 번도 알아보지 못하고 3년 반을 버티시다 먼 길을 떠나셨다. 그래도 반짝 하루 아빠와의 데이트가 있었는데, 요양병원으로 옮기는 날이었다.

응급차를 불러서 아빠 침대를 차에 태우는 날, 유난히도 햇살이 눈부셨다.

좁고 답답한 응급차 안에서 나는 아빠 손을 꼭 잡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정신없이 쏟아냈다. 꼭 감은 두 눈은 말씀은 없으셔도 마음속으로 다 듣고 있는 것 같았고, 어떤 말이 오고 가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할 수 있음을 나는 그때 알았다. 요양병원에 옮기는 것이 꼭 세상의 마지막으로 가는 열차 같아서 참아도 자꾸 흐르는 눈물 때문에 힘들었지만 웃어드리기로 마음먹었기에 꾹꾹 눈물을 삼켰다.


맘마미아를 보면서 컴컴한 영화관에서 아바의 음악을 들을 때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지. 유쾌하고 즐거운 영화 장면에 누가 그렇게 슬프게 울 일이냐고 누가 봤다면 정말 놀랐을지도. 다행히도 남편은 영화에 빠져 내 얼굴을 보지 못했었다.


내 곁을 떠나신지는 8년이다. 칠순 즈음이 되신 어르신을 보면 나는 아직도 울컥하곤 한다. 아니, 시아버님과도 또 그렇게 아빠와 한 것처럼 술을 나누다가도 혼자 또 훌쩍거리기도 한다. 주책바가지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해야 아빠를 잊을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직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아빠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을 어디에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빠께 매년 제사를 드리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약속한다. 아빠의 둘째 딸은 항상 열심히 살고, 자랑스러운 딸이 될게요.라고.


두 딸아이를 못 보시고 떠난 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 한여름, 중환자실에 계실 때 큰 아이가 누워있는 아빠를 문 앞에서 바라보다 멀리로 키티 부채를 꺼내 부채질을 해주던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더워 보여. 엄마."

작은 팔로 아프도록 부채질을 해주며 큰 일을 했다는 듯이 스스로 만족해하는 아이를 보며 또 한 번 울음을 삼키곤 했었다. 수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밤하늘을 물끄러미 여러 번 바라보았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라는 동화 속의 말이 나의 간절한 문장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안 했었지만, 결국 나의 이야기다 되어버렸고, 응답을 기다리듯, 아빠를 마음 속으로 목놓아 외치곤 했었다.


요즘도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볼 때면 아이들은 어느 새 다가와 내 옆에 서 있다.

그리고는 지긋이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엄마, 할아버지가 저기서 보고 있지? 라고.


아직 부족하고, 이제 시작한 글병아리지만 아빠 딸은 아빠를 늘 마음에 담고 살고 있다고 꼭 전해드리고 싶다. 아빠와 보낸 시간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앞으로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살거라고 꼭 말씀드리고 싶다.


내일은 아빠가 즐겨 오르시던 북한산을 올라가야겠다. 알록달록 가을이 내려앉은 북한산을 오르며 아빠의 숨과 온기를 흠뻑 느끼고 오고 싶다. 지금까지 내 울타리가 되어주는 소중한 남편, 두 딸의 손을 꼭 잡고서 말이다.


큰아이 그림-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산.jpg 큰 아이의 그림/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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