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이상한 힘이 있다. 사람을 유독 다운시킨다. 늘 보던 장소와 사람들이 다 달라 보이고, 생각은 바닥으로 또 바닥으로 자꾸 내려간다. 입맛도 거의 없어지는 계절. 우수수 내리는 은행잎 비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저린다. 또 한 살 더 먹는구나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 허탈함이 나를 둘러싸고 빙글빙글 돌다가 사라진다. 거울 속의 나는 그사이 변해있다. 팔자 주름은 조금 더 깊어졌고, 시간의 옷을 겹겹이 입어 티가 난다. 다른 사람이 몰라도 상관없다. 내가 아는 것이 가장 마음 아프고 신경 쓰인다. 겨울은 오히려 낫다. 추위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나는 아예 겨울채비를 가을부터 차곡차곡하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올 테면 와라다. 바람이 거세질수록 찬 바람을 피할 두꺼운 패딩을 보며 흐뭇하다. 근데, 가을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요즘의 감정 널뛰기는.
삐딱한 자태, 손에 자석처럼 붙어있는 휴대폰. 짜증 섞인 목소리와 노려보는 눈빛. 이 모든 걸 합치면 요즘 우리 둘째다.
"엄마, 나 사춘기가 왔나 봐. 이상하게 엄마가 말을 하면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어. "
"그래? 그런 게 다 느껴져?"
"어. 딱 이틀 된 거 같아. 나 사춘기야? 언니처럼 이상해져?"
큰 아이를 이미 겪고 있기 때문에 둘째가 사춘기를 이렇게 다정하게 고백할 줄은 몰랐다. 엄마니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안 하던 말투와 널뛰는 감정 기복, 학원 가기 전에 극도로 예민해지는 둘째를 보면서 왔구나 싶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데 풋풋 웃음이 났다. 식은땀을 꾸역꾸역 닦으면서 둘째의 말을 되뇌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근데 왜 나 요즘 왜 이렇게 자주 덥지? 열감이 올라와서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달았다. 공기가 상쾌했다. 대놓고 바람을 맞으니 다시 추워졌다. 으스스 몸을 부르르 떨고 다시 창문을 닫았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둘째가 말했다.
"덥다고 열더니 왜 바로 닫아?"
"추워서."
"왔네 왔어. 엄마도."
"뭐가?"
"갱년 기지!"
나는 평소에 말했다. 지나가다 갱년기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딸들에게. 엄마가 추웠다 더웠다 식은땀 줄줄 흘리고 가슴 답답해하거나 우울해하고 입맛도 없어하면. 그리고 또 이유 없이 울거나 그러면 말이야. 갱년기가 온 거야라고.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나는 딸 뜰에게 조기 교육을 시킨 셈이었다. 엄마의 갱년기 때 너무 외롭고 힘들어한다고 일하다 가족 비상회의에 불려 갔던 기억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형식적으로 모여서 촛불을 켜고 맛있는 데서 밥을 먹고 엄마와의 시간을 갖고는 각자 약속 장소로 가버렸다. 그렇게 가족들의 무관심을 느끼며 엄마가 홀로 이겨낸 아니 버틴 갱년기는 어땠을까. 이제와 고개가 숙여질 뿐.
나도 오는구나. 올해부턴가 시력이 급 떨어지더니 눈이 침침해서 영양제 없이는 눈이 괴로웠는데 다 사부작사부작 나는 과정을 밟고 있었던 거구나 싶었다. 아니면 벌써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주위에서 동안이에요. 그렇게 안 보여요. 체력은 언니가 나보다 좋아요. 언니 연하 남편이랑 살아서 회춘하나 봐요.라는 꿀 같은 말에 기대어 나를 숨겼는지도 모른다. 그게 더 맞는 쪽일 것이다. 나는 사실 갱년기라는 말이 갖는 무서움을 알고 있다. 이론적으로 너무 빠삭하고 주변에서 본 경험치도 많았다. 그렇게 어마 무시한 갱년기가 나에게는 아예 오지 않길, 아니 오더라도 천천히 오길 바랐었다. 사소한 증상을 겪으면서 아직 아니야라고 나를 위안하고 나를 감추고 숨었다.
나 사춘기야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둘째를 보는데 왜 내가 작아졌는지 모르겠다. 이 또한 갱년기 감정의 기복 때문인가. 하지만 적어도 나 갱년기야 라고 당당하지 못한 나 자신을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나이가 나를 먹고 또 먹고 가루가 될 때까지 잡아먹어도 나는 그냥 소녀이고 싶었으니까. 앞으로도 또 그럴 테니까. 그걸 놓아 버리면 이상하게 갑자기 할머니가 될 것 같다고 마법의 주문을 걸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둘째를 보니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나도갱년기야!라고 소리를 질러야지.표현해야지. 더 말해야지. 그렇게 드러내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둘째가 사춘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 동생을 불러서 사춘기 파티를 해 주기로 했다. 우리는 날 좋은 가을 한강변에서 즉석 통닭을 푸짐하게 깔아놓고 사이다를 들이키며 사춘기가 온 걸 축하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해 보라고 하였다.
"엄마는 내 방에 옷을 너무 많이 걸어 놨거든. 근데 그걸 다 없앴으면 좋겠어. 내 아지트가 필요하거든. 원래 이사 올 때 아지트를 준다고 작은 방이라도 찬성한 건데. 엄마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지금까지도. 나는 먼지가 폴폴 나는 내 방에서 뭘 하고 있으면 너무 화가 올라와. 그러니까 그 문제를 해결해줘."
둘째는 준비를 다 해놓은 아이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속사포처럼 말했다. 너무 다 맞은 말이어서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어려울 만큼. 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둘째의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 당분간은 잠이 올 때 잤으면 좋겠어. 엄마는 9시면 무조건 자라고 하는데 누워도 내
눈은 말똥말똥하거든. 누워서 뒹굴뒹굴한다고 잠이 오지도 않고. 엄마는 뒤척이는 소리 들리면 버럭 소리를 질러.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책을 읽다가 자라고 하는데 난 밤에는 책 보다 휴대폰이 더 보기 편해."
들으면서 스멀스멀 화의 기운이 올라왔다. 한강변의 바람이 그나마 나를 달래주지 않았다면 내 얼굴은 더욱 벌게졌을 거다. 화끈화끈 가슴에서 답답한 게 느껴졌다. 나도 아이한테 폭주기관차가 되어 잔소리를 쏟아붓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자리까지 만든 나인데, 마무리는 훈훈하게 하고 싶었다. 가까스로 감정을 다스리고 시원한 사이다로 한 번 더 가라앉혔다. 그렇게 하고 싶은 모든 말을 삼켰다. 온전히 사춘기의 시작을 알렸고 스스로 자기의 원하는 바를 또박또박 말하는 내 아이는 아주 정상적으로 크고 있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아이의 솔직한 마음을 들으니 이제는 뭔가 아주 조금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큰 아이처럼 막연하게 서로 감정 소모로 지치기 싫다. 사춘기라도 지혜롭고 포근하게 보내고 싶다. 갱년기도 따뜻하게 보내고 싶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아이의 뜻을 존중해주자. 바라는 게 위험하거나 수위를 넘는 게 아니라면 들어주자.
집으로 오자마자 아이 방의 옷가지부터 옮기기 시작했다. 목표가 정해지니 오히려 해결이 쉬웠다. 꾸역꾸역 다 옮기고 나니 내 미술 도구가 문제였다. 진짜 내 작업실 하나만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하던 순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보니 옷장 안에 비워있는 자투리 공간이 떠올랐다. 붓이든, 물감이든, 스케치북이든, 뭐든 그냥 다 형체만 구분하면 되니까 대충 다 때려 넣었다. 그렇게 둘째 방에는 아지트가 생겼다. 잠자는 시간 동안 책에 눈이 가지 않는 딸을 위해 내가 직접 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다행인 건 자기가 읽기 싫었을 뿐, 엄마가 읽어주는 책은 좋다고 했다. 불을 꺼놓고 나는 온라인으로 켜놓은 책을 넘기며 한두 장 읽어주었다. 뒤척이다 가물가물 눈을 감고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신기한 것은 아이에게 사춘기가 올 즘 나에게도 갱년기가 왔다는 것이다. 운명의 장난 같다. 아무튼 각자의 길을 달려가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다가 불같이 싸울 테고 서로 감정이 맞지 않아 으르렁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이란 도구로 슬기롭게 생활해 보려고 한다.
둘째가 스스로 사춘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갱년기의 내 이야기를 쓰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글쓰기는 사춘기와 갱년기의 긴 터널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어떤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을까. 글을 쓰며 울고 웃고 또 그렇게 시간과 추억이 쌓여가겠지. 문득, 궁금해진다. 어쩜 정말 생각보다 멋질지 몰라.
인지는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너무 오래 마음에 두고 끙끙 앓을 필요는 없다. 그냥 당당하게 받아들이자. 그렇게 개운하게 시작하자. 온 세상에 외치자. 오늘이 내 갱년기의 멋진 시작이다. 여러분 저 갱년기예요! 그러니까 다들 조심하세요! 남편 듣고 있지! 앞으로 더 잘하시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