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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부대

by 선희 마리아

질투 나는 시인이 있었다

기발함,
감수성,
상상력,
언어유희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타고난 재주는 없어도
마음은 시인이어서
수많은 날들을
끙끙대며 쥐어짜고 있을 때

시인은
내놓는 시마다
장안을 회자하며 독자몰이를 하였다

몸을
가죽부대로 표현한 시가 있었다

어느 날
나도 앉아서
내려다 보니
영락없는 가죽부대였다

탄력 회복성
제로인
가죽부대

축 늘어진
가죽부대에는
무엇이 담겼을까

가죽부대에 담긴
내 영혼은

익었을까
삭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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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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