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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Jul 02. 2024

홍 장로님

교회에서는 죽는 것을 '소천召天'이라고 한다. 나그네길이었던 이 세상을 떠나 본향, 즉 원래의 집으로 부르셨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아도 결국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의 궁극적 목적을 귀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홍장로님의 고향은 평안남도 진남포 근처였다. 어린 시절 평양 대동강 건너에서는 최초의 교회였던 고향의 교회를 다녔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소년의 마음을 달래주던 유일한 곳이었다.


해방이 되자 북쪽은 공산치하가 되었다. 선교사들이 들어와 교회와 학교 등을 세우며 활발하게 포교하여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과 북한 전역은 시간이 갈수록 종교적 박해와 탄압으로 동토가 되어 갔다. 6.25 전쟁이 터지자 공산 체제를 견디지 못하던 북쪽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장로님도 1.4 후퇴 때 퇴각하는 국군을 따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고향 교회의 목사님과 교인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같은 동네, 같은 교회의 교인으로 사선을 넘어 내려온 남쪽에서 고향에서와 같은 신앙공동체로 모여 살고 싶었지만 코앞에 닥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장로님은 후퇴하던  국군을 따라 내려오다 부족한 군인을 보충하려는 국군에 현장 입대를 하게 되었다. 전쟁 중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기댈 곳 없던 장로님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었다.  


남하하는 부대를 따라 광주까지 오게 되었고, 전쟁이 끝나자 제대하여 광주에 자리를 잡았다. 고향을 떠난 이유가 되었던 신앙은 굳게 지켜 나갔다. 광주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중매로 만난 남쪽 처자와 결혼하여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장로님은 부인을 무척 위했고 금슬이 좋았다. 부인을 하대하거나 함부로 하지 않았다. 천성이 성실하여 교회 관리, 양 목장, 택시 운전,  종이 박스 만드는 지함공장 등 여러 일을 하면서 가정을 지켜 나갔다.  3녀 1남의 아이들을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교육시켜 번듯한 사회인으로 키워내었다.


단란하고 행복하게 살던 장로님은 생각지도 못하게 부인과 빠른 이별을 하였다. 지나칠 정도로 금슬 좋게 살던 부인이 60대가 되기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 후 장로님은 30년이 가깝도록 혼자 살면서 흐트러지거나 나태하거나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꿋꿋하고 의연하게 외로운 삶을 살아 내셨다.


고향까지 떠나게 하였던 신앙을 끝까지 지키셨다. 90대 중반이 넘어갈 때까지 주일과 수요일이면 교회의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셨다. 돌아가시기 1년 전에도 교회에 나와서 반드시 본당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2층으로 힘겹게 올라가시곤 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기력이 없어지면서 계단을 오르지 못하게 되자 1층에서 예배드리다가 출입하지 못하게 되신 것이 약 1년 전이었다.


장로님의 생애를 회고해 보면 참으로 소박하고 성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역사의 격변기를 몸소 겪어내면서 초기 기독교인으로서의 고난을 감수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결단까지 하신 것이다.  


작은 키에 자그마한 체구이셨으나 성실하고 신실하셨다. 온화하고 따뜻하여 언제나 웃는 모습이셨다. 이북 말투로 낮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말씀하셨다. 남을 험담하거나 비난하는 소리가 없으셨다. 욕심을 부리거나 지나친 자랑도 없으셨다. 체구는 작고 가냘팠지만 거인의 풍모를 지니셨다.


90대 중반까지 가까이에 있는 아들네 집을 왕래하시면서 단정하게 생활하셨다. 노환이 깊어가자 가까이 살던  딸이 아버지를 모셨다.  딸네 집에서의 생활은 천국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출근하면 아침식사를 하고 딸과 함께 가정 예배를 드리셨다. 저녁에도 식사를 일찍 마치고 저녁 예배로 하루를 마무리하셨다. 딸과 함께 자신의 평생을 이끌어 간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세세하게 하시면서 신앙을 유산으로 남기셨다. 장로님의 육신은 누에고치처럼 점점 말라가고 진이 빠져나갔다. 천수를 다하시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자리에 누워 주무시는 시간이 늘어났다.  빨리 천국에 가서 평생 잊지 못하였던 권사님과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장로님은 잠을 주무시지 않고 자주 허공을 쳐다보셨다. 뭔가를 황홀하게 보는 것 같으면서 웃기도 하셨다. 딸이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면 천국이 보인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보셨냐고 하면 예수님이 보인다고 하셨다. 또, 바람이 보인다고 하기도 하셨다.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온 가족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정신은  총총하셔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아멘으로 화답하셨고 들리지는 않지만 찬송가를 따라 부르는 입모양이 보였다. 모든 가족들을 다 만나고 난 뒤에는 아무런 마련이 남지 않으신 듯 평안했다. 이틀 뒤 새벽에, 장로님은 문쪽을 쳐다보며 세상을 떠나셨다.  98세의 천수를 다 하신 것이었다.


홍장로님의 노후는 따뜻하였다. 모시는 딸의 정성이 지극하였다. 고슬고슬한 잠자리와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효심이 장로님의 마지막을 귀하게 하였다. 안방 침대에 아버지를 모셔놓고 찬송가를 들려 드리면서 함께 기도하였다. 아버지도 찬송가를 따라 부르고 기도할 때마다 아멘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응답하였다.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였지만 당신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외침이었으리라.


신앙을 찾아 고향을 떠나서 평생을 고결하고 깨끗하게 살아온 장로님의 임종은 이 땅에서의 삶을 가족들 앞에서 끝맺음하는 축복의 순간이었고 하늘나라의 실재를 확인시켜 준 감동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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