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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Jul 19. 2024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

생텍쥐페리 (다음 이미지)

앙투안 장-밥티스트 마리 로제 드 생텍쥐페리(Antoine Jean-Baptiste Marie Roger de Saint-Exupéry)라는 긴 이름의 작가를 아시는지? 전 세계 160개 언어로 번역되고 1억부 이상이 팔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의 저자인 생텍쥐페리의 본명이다.


생텍쥐페리는 1900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생텍쥐페리의 정체성은 비행기 조종사와 소설가로서의 복합적인 것이었다. 두 가지에 대한 생텍쥐페리의 열정은 대단하여 어느  한 가지만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 스스로도 "비행과 글쓰기 중 하나만 선택하기란 불가능하다. 행동하는 것과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 둘 모두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생텍쥐페리가 10대에 갖게 된 조종사의 꿈은 20세가 되어 민간 조종사 자격증과 군용기 조종 면허장을 취득하면서 실현되었다. 그는 프랑스 육군으로 징집되어  항공연대에 배치되면서 비행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항공기 추락사고로 두개골이 골절되면서 소위로 의병 전역하게 되었다. 1926년 생텍쥐페리는 라테코에르 항공사에 취업하여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와 세네갈의 다카르 간의 정기 항공우편 조종사로 근무했다.1927년에는 야간 항공우편 비행을 시작했고 불시착 항공기 수리 업무와 조난 비행사 구조 업무도 함께 병행하였다.


야간 항공우편 개척기 멤버였던 생텍쥐페리는 야간비행의 특별한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1927년에  『남방 우편기』를 발표하여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1931년에는 『야간비행』을 집필하여 페미나 문학상을 받았다. 1939년 2월에는 『인간의 대지』를 발표하여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수상하였다.


생텍쥐페리는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39년 9월 프랑스 공군 제33정찰비행대대 2비행대에 동원 지정되어 공군 정찰기 조종사로 근무하게 되었다.1940년 5월 10일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4년 7월 31일 오전 8시 25분 생텍쥐페리는 정찰비행을 위해 6시간 분의 연료를 탑재한 정찰기를 몰고 이륙했으나 6시간이 지나도록 기지로 돌아오지 않았고, 이륙 8시간 30분 뒤에 실종으로  보고되었다. 그때는 전시 상황이라 추락사고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1948년에 전쟁 중 사망으로 인정되었다.


그후 53년이 지난 1998년 9월 마르세유 남동쪽 앞바다에서 작업하던 어부의 그물에 생텍쥐페리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팔찌가 건져 올려졌다. 그리고  수중탐사장비로 바다 깊숙히 가라앉은 라이트닝 정찰기를 발견함으로써 독일군에 의해 격추된 그의 최후가 밝혀졌다.


생텍쥐페리의 비행기 조종사로서의 경험이 생생하게 녹아있는 『남방우편기(1927년), 『야간비행』(1931년),  인간의 대지(1939년)등은 생텍쥐페리의 초기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린왕자』(1943)생텍쥐페리가 죽기 1년 전에 썼던 후기 작품에 속한다.


 『야간비행』초간본의 서문을 썼던  앙드레 지드는  『야간비행』의 특장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미지의 땅을 탐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항공에서도 초기의 영웅적 시대가 있었다. 그런 만큼 하늘의 개척자가 겪는 비극적 모험을 그리는 이 책은 자연스럽게 서사적인 울림을 갖는다. 8쪽.'
생텍쥐페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그가 직접 체험한 일들에 근거한다. 계속되는 위험에 직접 맞섰던 경험 덕에 이 책에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진정한 풍미가 담겨 있다. 우리는 수많은 전쟁소설과 상상의 모험 소설을 읽어왔다. 그중에는 간혹 저자의 유연한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지만 실제로 모험을 겪은 사람들이나 실제로 전투에 참가해 본 사람들이라면 실소를 금치 못할 작품도 있다. 이 책은 내가 높이 평가하는 문학적인 가치 말고도, 기록 문서로서의 가치 또한 지니고 있다. 이 두 가지 장점이 독특하게 짜 맞춰져 『야간비행』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11쪽.

1931년 발표된  『야간비행』의  초간본에 당대의 소설가인 앙드레 지드의 서문이 실려있는데 이 서문에서  『야간비행』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생텍쥐페리는 야간 항공우편의 항로를 개척하는 초창기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개척 단계는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로 미지의 문을 여는 모험과 위험이 공존하는 시기이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야간비행을 개척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앙드레지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항공 회사가 직면하는 문제는 다른 운송 업체들과 어떻게 속도 경쟁을 하느냐에 있다. 이에 대해 훌륭한 지도자로 그려지는 리비에르는 『야간비행』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에게 속도 경쟁이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낮 동안 철도나 선박에 비해 앞섰던 것을 밤마다 까먹기 때문이다’  야간 비행은 시행 초기에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차후 허용되어 일단 위험을 무릅쓰기로 한 후 현재와 같이 상용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소설이 집필될 때에만 해도 매우 위험한 사업이었다. 알지 못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항공로는 뜻밖의 사건으로 가득 차 있고 거기에 믿을 수 없는 밤의 수수께끼까지 더해진다.  7쪽.


소설  『야간비행』의  시간적 배경은 파타고니아선, 칠레선, 파라과이선을 취항하는 우편기 세 대가 남쪽, 서쪽, 북쪽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자정에 가까운 밤이다. 이들 비행기들은 각각 자기들의 이륙지에서 모인 우편물들을 싣고 중간기착지인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자정 무렵이 되면 이들  세 비행기의 우편물들을 적재하고 출발할 수 있도록 유럽행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다.  공간적 배경은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과 각 노선의 비행기들이 날아오고 있는 항로이다.


 『야간비행』의 주요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육지와 해상의 우편수 수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야간비행』의 불가피성을 극력 주장하면서 야간 우편항로를 개척해 나가는 모든 항공망의 총책임자 리비에르,  알 수 없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우편항로 개척의 모험에  동참한 비행사들, 야간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지상의 사무원들과 기술공 등의 조력자들과 가족들이다.


『야간비행』의 주된 줄거리는 이렇다.

모든 항공망의  책임자인 리베에르는 정부 관료들에게 야간에 우편물을 실어나르는 야간비행을 감행해야 밤낮으로 달리는 철도와 선박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야간우편항로 개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당시에 야간비행이란  군사 비행에서나 있을 법한 모험으로  맑은 밤에 떠나 폭격을 하고는 다시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경우들이었다. 정부각료들은  칠흑같은 밤에  만날 수 있는 온갖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시속 이백 킬로미터의 비행기를 운항해야 하는 야간의 정기적인 우편 비행은 실패의 위험성이 너무도 크다고 극력반대하고 나선다. 리비에르는 야간비행의 불가피성을 “우리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낮 동안 철도나 선박에 비해 앞섰던 것을 밤마다 까먹기 때문이죠.”라고 역설하면서 정부관료들을 설득하고 모험에  동참하는 조종사들과 야간 항로 개척에 나선다.  야간비행에 합류한 조종사들과 리비에르는 정복이라는 동일한 욕망을 품고 한 배를 탄 사람들로 마음 깊이, 말없는 우애로 결속되어 있는 동지들이었다.


오랜 논란 끝에 리비에르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야간비행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초반에는 해 뜨기 한 시간 전에 출발했고, 해가 진 후 한 시간 안에 도착하는 시험 단계를 거쳐야 했다. 리비에르는 경험상 안전하다는 판단이 섰을 때에야 우편기를 깊은 밤 속으로 떠나보낼 수 있었다. 정부와 사회의 비난과 우려를 한몸에 받으며 리비에르는 야간비행 항로 개척을 위한 고독하고 위험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야간비행의 안전과 위험, 성공 여부는 모두 리비에르의 책임이었다.


야간비행 동안 가장 긴장하고 불안에 떠는 사람은 리비에르이다.  비행기를 직접 타지는 않지만 지상에서 비행기를 띄우기까지의 모든 준비와  비행 중의 끊임없는 교신, 비행기가 무사히 안착할 때까지 가장 긴 시간을 긴장 속에서 보내는 사람이 리비에르이다.

'내 우편기 두 대가 비행 중인 오늘 밤, 나는 온 하늘을 책임지고 있다. 저 별은 이 군중 속에서 나를 찾다가 발견하는 신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좀 이방인 같고, 좀 고독한 거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51쪽.     

우편기 두 대가 비행 중인 때에 외부로부터 걸려 오는 밤의 전화는 얼마나 위협적인가! 54쪽.


리비에르는 야간비행에 위협이 되는 모든 요소들에 대해 가혹하리만큼 냉정한 처사를 취한다.

모든 사람들과 직원들은 리비에르가 세운 규칙을 절대로 어겨서는 안되고 리비에르는 규칙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을 가장 우선시 하였다. 리비에르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까지 정시 이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당을 지급하지 못하게 했고, 비행기 부품의 조립을 느슨하게 한 20년 경력의 늙은 조립공을 가차없이 해고하도록 한다. 리비에르는 이러한 일 처리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사람으로 비쳐지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항상 자기의 결정에 대한 불가피성, 그런 냉정한 결정을 하여야 하는 인간적 회의로 괴로워한다.   

리비에르는 주름 잡힌 두툼한 피부 거죽, 그 아름다운 피부 거죽을 보지 않으려 눈길을 돌렸다. 58쪽.

내가 이처럼 가혹하게 내쫓는 것은 저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그에게는 책임이 없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를 거쳐 나타나는 잘못을 내치는 거다. 왜냐하면 사건이란 사람이 명령하는 것이니까. 사건이란 사람에 따르는 것이고, 만들어내는 건 사람이니까. 인간이란 보잘 것 없는 물건이며 이 역시 만들어지는 거다. 그러니 잘못이 사람들을 통해 나타난다면 이들을 멀리할 수 밖에. 59쪽.

 드디어 야간비행이 시작되었다. 두 대의 비행기는 순항하고 있다.

야간비행이 시작되었다.  파타고니아선, 칠레선, 파라과이선 우편기 세 대가 남쪽, 서쪽, 북쪽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돌아오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자정경 유럽행 비행기가 출발할 수 있도록 세 비행기의 우편물을 적재하려고 기다리는 것이다.  21쪽.
"칠레 우편기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불빛이 보인다고 기별해 왔습니다." 22쪽.  

"아순시온선 우편기는 순항 중일세. 2시경이면 도착할 거야. 반면 난항을 겪는 듯한 파타고니아선 우편기는 꽤나 연착할 것으로 예상되는군."  78쪽.  

칠레 노선과 파라과이 노선의 비행기는 무사히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착륙하였다. 그런데 , 남극 지방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를 연결하는 파타고니아선 우편기의 행방이  묘연하게 된 것이다. 피티고니아선 우편기의 조종사 파비앵은 결혼한 지 6주 밖에 되지 않은 신혼이었다.    

파비앵의 파타고니아 비행은 황홀할 정도로 고요하고 행복하게 출발하였다.  

남극지방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파티고니아선(線) 우편기를 몰며 날아오는 조종사 파비앵은 마치 항구의 바다 물결과 같은 신호로, 즉 이 고요함과 잔잔한 구름이 살며시 짓는 가벼운 파문으로 밤이 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거대하고도 행복한 정박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15쪽.

때로 그는  바다보다도 인적이 드문 대초원을  백 킬로미터 지나 외딴 농가와 마주하기도 했는데, 그건 마치 인생이라는 짐을 싣고 대초원의 출렁이는 물결 속에서 뒷걸음질 쳐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그는 배에게 인사하듯 비행기 날갯짓으로 인사를 보냈다. 16쪽.

이렇게 시작된  파비행의 비행은, 폭풍 가운데 표류하며 방향을 잃고 행방불명이 된다.

무선사가 조종사에게 종이쪽지를 건넸다. ‘뇌우가 어찌나 심한지 이어폰이 잡음으로 가득합니다. 산 훌리안에서 하룻밤 묵어갈까요?’ 파비앵은 미소 지었다. 하늘은 수족관처럼 고요했고 그들 앞에 놓인 모든 비행장은 ‘하늘 맑음, 바람 없음’이라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계속 갑시다”라고 파비앵이 대답했다. 그러나 무선사는 과일 속에 벌레가 들어 있듯 어딘가에 뇌우가 박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은 아름다울 것이나 그것은 언젠가 상하게 될 아름다움이었다. 무선사는 썩기 일보 직전의 이런 어둠 속으로 들어서는 게 몹시 꺼림칙했다. 16쪽.
멀리서 뇌우의 첫 소용돌이가 비행기를 공격했다. 부드럽게 떠밀린 금속 덩어리인 비행기가 무선사의 육신을 짓누르다가는 이내 사라져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그는 몇 초 동안 홀로 떠다녔다. 그래서 그는 양쪽의 금속 봉을 두 손으로 꽉 움켜 잡았다. 사방천지에 조종실의 붉은 등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이 작은 램프에만 의지하여 아무 도움도 없이 밤의 한복판으로 내려가는 것 같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감히 조종사에게 어떻게 할 작정인지 물어볼 엄두도 못 내고, 두 손으로 금속 봉을 꽉 쥔 채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의 어두운 목덜미만 응시했다. 48쪽.
"산 안토니오의 날씨를 물어봐 주시오." '산 안토니오에서는 서풍이 불고 서쪽에 폭풍우, 하늘이 완전히 구름으로 뒤덮였다는 보고.' "잡음 때문에  여기 소리가 잘 안 들린다고 합니다. 저도 역시 그쪽 소리를 듣기 힘들고요. 전파 방해 때문에 곧 안테나를 끌어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어떻게 할 계획이시죠?""조용히 좀 하고, 바이아블랑카의 날씨나 물어봐 주시오."  ‘바이아블랑카에서는 이십 분 내로 바이아블랑카 서쪽 상공으로 거센 폭풍우가 예상된다는 보고.’ "트렐레우의 날씨를 물어봐 주시오." ‘트렐레우에서는 서쪽으로 초속 삼십 미터의 태풍과 폭우를 동반한 돌풍이라는 답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교신해 주시오.” ‘사방이 막혔음. 천 킬로 미터에 걸쳐 폭풍.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76쪽.
조종사에게 이 밤은 기착지가 없는 밤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항구로도 접근할 수가 없어 항구에 이를 수도 없고, 1시 40분이 지나면 연료가 바닥날 것이라 새벽까지 버틸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이 칠흑같은 어둠 속을 정처없이 흘러다녀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76쪽.
그는 아직은 싸울 수 있고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외적인 숙명이란 없으니까. 그러나 내적인 숙명이란 있는 법.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현기증처럼 여러 가지 실수가 우리를 엄습한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 위로 폭풍우 틈새를 통해 마치 덫 속에서 죽음을 부르는 미끼처럼 별 몇 개가 반짝였다. 그는 그것을 함정이라고 판단했다. 구멍 속으로 별 세 개를 발견하고 그 별들을 향해 올라가면 더 이상 내려 올 수 없어 거기서 별을 깨물며 머물게 된다는 함정....하지만 빛에 대한 목마름이 너무 강했던 탓에 그는 그만 올라가 버렸다.  95쪽.
몇 초가 흐른다. 시간이 정말이지  피처럼 흐르고 있다. 아직도 비행을 계속하고 있을까? 일 초 일 초가 가능성을 앗아가고 있다. 이제는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파괴하는 듯 느껴진다. 20세기가 흐르면서 시간이 신전을 건드리며 화강암 속으로 길을 내고 신전을 먼지로 부스러뜨리듯, 일 초 일 초 흐를 때마다 마멸의 시간이 밀집하여 승무원들을 위협하고 있다. 매초가 흐를 때마다 무엇인가를 앗아간다. 파비앵의 그 목소리, 파비앵의 그 웃음, 그 미소를, 침묵이 계속 퍼져 나간다. 점점 더 무거워지더니 육중한 바다처럼 승무원들 위로 자리 잡는다. 112쪽.
리비에르는 말없이 머리를 숙인 채 자신의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앞에 선 로비노는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사자는, 비록 쓰러진 상태일지라도 그를 움찔하게 했던 것이다. 로비노는 보다 더 헌신적인 말을 준비했지만, 눈길을 들 때마다 마주 하는 것은 4분의 3쯤 기울어진 그의 머리와 반백의 머리칼, 지독한 쓰라림을 맛보는 앙다문 입술 뿐이었다. 116쪽.
아순시온선 우편기가 곧 착륙하겠다고 알렸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리비에르는 한 장 한 장 전보를 들춰 보며 그 우편기의 순조로운 비행을 지켜 보았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이 혼란의 와중에 할 수 있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설욕이자 증명이었다. 이 순조로운 비행은 전보를 통해 다른 수많은 비행 역시 순조로우리라는 점을 예고해 주었다. ’매일 밤 태풍이 오는 건 아니거든.' 리비에르는 또 생각했다. ’일단 길을 닦아 놓으면, 그 길을 좇지 않을 수 없어.‘119쪽.
승리.....패배.... 이런 말들은 아무 의미도 없다. 생명이란 이런 이미지들의 저 아래 깊은 곳에 있으면서 벌써 또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준비하고 있다. 한 번의 성공으로 인해 한 국민은 약해지고, 한 번의 패배로 인해 다른 국민은 각성하게 된다. 리비에르가 겪었던 패배는 어쩌면 진정한 승리에 가까워지는 하나의 약속인지도 모른다. 오로지 전진하는 사건만이 중요할 뿐이다. 122쪽.

파비앵이 조종하는 파타고니아선 우편선이 행방불명이 되자 사람들은 리비에르가 유럽행 야간 우편기를 띄우는 것을 중단하고 야간비행을 포기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렇지만 리비에르는 곧 바로 유럽행 우편기를 이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시를 받으러 왔습니다.” 리비에르는 자기 시계를 꺼내 보더니 간단히 이렇게 말했다. “2시로군. 아순시온선 우편기가 2시 10분에 도착할 걸세. 2시 15분에 유럽선 우편기를 이륙시키게.” 이윽고 로비노는 야간비행이 중단되지 않으리라는 놀라운 소식을 퍼뜨렸다. 117쪽.

생텍쥐페리는 야간비행의 진정한 주인공을 파비앵이 아니라 리비에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리비에르에 대해 앙드레지드는 이렇게 말한다.

『야간비행』에 나오는 조종사보다 훨싼 더 놀라운 인물은 그의 상사인 리비에르이다. 리비에르는 직접 행동하지 않는다. 다만 조종사들이 자신의 가치를 믿도록 하고 그들이 가진 최대의 능력을 끌어내며 용맹한 행위를 하도록 강제함으로써, 타인을 행동하게끔 독려한다. 그는 가차없는 결정을 내려 겁이 나 움칫하는 것을 봐주지 않고, 아주 사소한 실수도 처벌한다. 그의 엄격함이 일견 비인간적이고 지나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리비에르가 단련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결점이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다. 리비에르에 대한 묘사를 읽으며 우리는 저자가 진정 탄복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감지한다. 특히 나는 내가 심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 즉 인간의 행복은 자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받아들이는데 있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표출한다는 점에서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이 책의 인물들 하나하나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 그 위험천만한 일에 진심으로 열성을 다해 헌신하며, 그 임무를 완수하고 나서야 행복한 휴식을 찾는다. 리비에르는 결코 냉정한 사람이 아니며(실종된 조종사의 아내가 그를 방문하는 장면보다 더 감동적인 장면은 없다.) 그가 조종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일은 조종사들이 이를 수행하는 것 이상으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8쪽.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받으려면 동정하는 걸로 충분해. 나는 거의 동정을 하지 않거나 혹은 동정한다는 걸 숨기지.(....) 가끔은 나도 내 힘에 놀라곤 해."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부하들을 사랑하되 부하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되네." 의무감 또한 리비에르를 추동한다. '의무에 대한 막연한 감정이 사랑에 대한 감정보다 위대하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이란 그 자체로는 목적이 아니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종속되고  그것을 위해 희생한다. 그 무엇인가가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으로부터 참된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9쪽.


아! 생텍쥐페리! 그의 이름을 그냥 평범하게  부를 수는 없다. 나는 생텍쥐페리의 작품 중에서 『야간비행』을 제일 좋아한다. 『어린왕자』에서처럼 심오하거나 현학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개척자들과 선구자들의 심리와 용기, 그리고 수많은 난관과 이해 받지 못함에도 신대륙을 향해 나아가는 탐험심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거기에 도달하려는 실행력 등이 숨막히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야간비행』의 주인공을 비운의 파비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책을 다 읽을 무렵에  『야간비행』의 주인공은 어떠한 역경과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쉴새 없이 자신에게 엄습하는 불안과 쏟아지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모험을 중단하지 않는 리비에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앙드레지드의 글에서 확인되는 것 같아 기쁘지 그지 없었다.

이 글에서는 『야간비행』의 본문을 많이 인용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표현으로도 생텍쥐페리의 별과 같이 아름다운 글을 흉내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또 어느 한 문장도 버리고 싶지 않은 경탄과 경외의 심정을 담은 헌정이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인간의 정신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동경을 인간의 가장 고귀한 유산으로 정의한 생텍쥐페리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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