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이여 북침이여 이건 전쟁이다!

어머님의 속사정

by 재서이

뭐가 그리 급하셨을까. 합가에 대한 나의 걱정과 고민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안 중요하다는 듯이. 그런 걱정과 고민 따위에게 시간을 쓰는 것은 사치라는 듯이, 어머님은 지쳐버린 몸과 마음이 기댈 곳이, 안식처가 시급하게 필요하셨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스무 살 때부터 십오 년을 살아내셨다는 서울 먹골집은 함께 지나다녔던 골목길만 봐도 아버님도 떠오르고, 무섭고 외로워 혼자서는 절대 못 사시겠다는 어머님을, 경제적 이유보다는 정서적인 문제로 우리가 떠안듯이 모시게 되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진행시켰던 아버님 유품 및 짐정리를 명목으로 세간살이 다 버리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 장지에 발인까지 하고 어머님은 필요에 의한 분류인지, 필요한 것도 버리고 오셨다는 알 수 없는 분류법에 속한 잡동사니와 함께 우리 집으로 거처를 옮겨 오셨다. 짐 빼고 볼 일 보고 아버님 사망신고 하러 서울에서 동탄을, 동탄에서 서울을 세 번 왕래하시고는 안방마님인 내 마음이 변할 새라 일주일 안에 일사천리로 이곳서 전입신고까지 마치신 어머니. 어머니의 시간은 남들보다 세 배 속으로 흘러가는 듯 느껴졌다.


6.25 한국전쟁은 명백히 남침이다. 북쪽에서 내려와 남쪽을 친 거다. 시댁이 서울인 나로서는 서울 사신 어머님이 경기남부에 위치한 화성시 동탄의 우리 집으로 쳐들어 오셨다고 해석이 될 만큼 모든 것이 속전속결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아버님 당신께서 살아생전 병원비, 치료비, 입원비, 장례비를 만들어 놓고 가셨다. 당신이 떠나고 남겨지는 배우자의 여생을 위한 얼마간의 비상금 정도까지.

그렇다고 남의 속도 모르고 시댁이 돈 있는 집이라고 어머님 부양하는 거라고 가볍게 넘겨짚지 마시길. 형제끼리 나눠 아버님의 유산 상속받아도 24평의 전셋집에서 30평대 아파트 매매로 이사하려면 어머님 대출 끌어 모아도 은행 대출이 필요한 형편이니까.


시댁 살림을 잘 몰랐지만 직간접적으로 들려오던 과거 IMF 파산, 빚과 빚쟁이 이야기 등으로 어려운 형편에 열심히 사시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도 빚은 모두 갚아 청산하셨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유산으로 빚을 받는다면 형제들끼리 똑같이 나눠 갚을 생각이 무의식 중에도 있었나 본지, 나는 신혼살림 때부터 지지리 궁상맞게 살았었다. 필요한 것도 안 사고, 먹고 싶은 것도 참았던, 사람 좋아하는 나인데 나가면 돈 쓰는 게 벌벌 떨려서 열 번의 약속을 한 번의 모임으로 줄이는 등의 비상한 재주도 발휘하곤 했다. 곳간에선 인심이 난다지만 없는 형편에서는 때때로 창의적 발상이 나오곤 한단 이상한 논리를 세우며.


장례식 때 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해 주셨다. 거의 70퍼센트의 손님이 역시나 하늬아빠 조문객이신 것 같았다. 인생을 참 잘 살아왔네, 근 십 년의 세월 동안 한 직장에서 갈아 넣듯 회사일 자기 일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해도 참 많은 분들의 감사의 은혜를 받았다. 아버님도 돌아가신 후지만 절 많이 받으시고 효도받으시고 가시네요. 장례식 때 받은 조의금을 어머님, 형님(시누이), 남편, 나 이렇게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조의금을 비상금 통장에 넣으러 어머님은 형님 생일을 앞두고 생일용돈을 무통장입금하러 농협으로 향했다.



"너희들이 오라는데 너희들 마음 바뀔까 봐 홀랑 내려왔어.."

"... 네? 어머님이 우시면서 제 손 붙잡고 같이 살자고 부탁하신 거잖아요."


어머님은 전쟁통 같은 내 심정을 아시고 저러시는지, 불난 집에 부채질하시는 것인지.

내가 가진 가장 두꺼운 덕다운 겨울 패딩을 입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어머님의 스매싱이 나의 등짝을 두드렸다. 꽤나 강력한 울림이 전해진다.


손톱 밑 또는 목 안의 가시라도 당해본 자만이 안다고 하나, 사별의 고통은 이 세상 고통의 최고봉이라고 한다. 당해본 적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헤아릴 길 없는 최고난도의 이별을 겪으신 우리 어머니. 어머님이 내 등짝을 때리시던 그때 어머니의 속사정은 어떠셨을까.




"미안하고 고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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