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인왕산
연이은 맹추위에 헐벗고 황량해져만 가는 기분이 드는 요즘. 며칠 전 하얗게 내린 눈으로 도시가 환해졌다. 흰 눈이 쌓여 무채색으로 변한 동네 뒷산들이 비로소 겨울 산의 존재를 드러낸다. 자박자박 눈을 밟으며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인왕산(340m)에 올랐다. 거추장스러운 등산장비들을 갖추고 새벽같이 일어나 큰맘 먹고 가야하는 겨울 산과 달리 눈 내린 날에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산이라 좋다.
인왕산은 1751년(영조 27년) 영조 임금의 총애를 받던 화가 겸재 정선이 75살에 그린 인상적인 그림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함께 떠올리게 한다. 비온 뒤 안개가 산을 감싼 인상적인 순간을 그린 그림으로, 제(霽)자는 ‘비나 눈이 그치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이 그림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라 하여 중국풍을 모방하지 않고 조선의 고유한 풍경화를 추구한 국보 제216호의 귀한 그림이다.
화강암 바위가 많은 늠름한 인왕산의 특징이 잘 표현돼 있어 그림을 볼수록 이 산에 가보고 싶게 한다. 조선시대 여러 진경산수화 중 단연 으뜸으로 여겨질 만하다. 자세히 보면 조선 건국 때 산 능선에 만든 한양도성 성곽의 모습도 담겨 있다.
인왕산 자락 종로구 수성동 계곡 부근에 살았다는 겸재 정선 또한 인왕산이 동네 뒷산이었으리라 생각하니 그림이 한층 친근하게 보였다. 인왕산은 1968년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비가 침투했던 1·21 사태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에야 시민들에게 개방된 사연도 품고 있다.
인왕산길을 걷다가 문득 겸재 정선의 마음으로 그의 그림을 떠올리며 눈 내린 겨울 산을 무채색 사진에 오롯이 담아 보고 싶어졌다. 거의 쓰지 않았던 카메라 흑백기능을 선택한 후 액정 창으로 바라보이는 인왕산 설경이 새롭고 새삼스러웠다.
인왕산으로 오르는 여러 들머리 가운데 선택한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 아래 첫 계곡이다. 조선시대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 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렸으며, 수성동의 '동(洞)'은 현재의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동'이 아니라, '골짜기 또는 계곡' 이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수성동은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북악산(백악) 삼청동과 함께 주변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답기로 첫 손가락에 꼽힌 곳이다. 조선후기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 등에 명승지로 소개되었다. 지금은 동네 주민들이 거닐고 산책하는 인왕산 기슭의 정다운 계곡이 되었다.
* 수성동계곡 교통편 : 3호선 전철 경복궁역 앞(3번 출구) 마을버스 9번 - 수성동계곡 하차
이곳은 1971년 계곡 좌우로 옥인시범아파트 9개동이 들어서면서 수려한 경관을 잃고 말았다. 40년이 지난 2012년 난개발의 상징인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고 이 계곡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이후 수성동 계곡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되었다. 역사와 자연, 그리고 문화가 어우러진 수성동 계곡 복원사업은 국토교통부 주최 '2014년 대한민국 국토도시디자인대전'에서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수성동 계곡 외에도 일제강점기 남산에서 인왕산으로 옮겨온 국사 신당인 국사당과 한양도성의 경계 설정을 놓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논쟁을 벌인 일화가 전해지는 신묘한 선바위 등 인왕산은 산행의 재미를 더해주는 명소가 많다. 능선을 따라 산 정상까지 이어진 한양도성 성곽길도 빼놓을 수 없다.
북악산, 남산, 낙산과 함께 한양의 내사산(內四山)인 인왕산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산이라 해서 서봉(西峯) 또는 서산으로 불리다가, 세종 때 처음 인왕산이란 이름을 지었단다. 인왕(仁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다른 이름이다. 조선왕실을 수호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유교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고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시대에 뜻밖의 지명이다.
남산이나 북악산은 남산 순환로, 북악 스카이웨이 등 차량들이 오가는 차도를 깔아놓아 공기와 풍경을 해치고 산행이 제한적이다. 이와 달리 인왕산은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산중의 아름다운 경치를 오롯이 감상하며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인왕산의 다채로운 기암괴석은 산에 찾아간 사람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준다.
장군바위, 삿갓바위, 치마바위, 돼지바위에서 스님을 닮은 선바위, 책 모양을 한 책바위, 심지어 해골바위도 있다. 건장한 남성의 얼굴을 한 장군바위를 보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마치 오랜 시간에 걸쳐 인왕산이 바람의 힘을 빌려 만든 조각품 같았다. 산행이 아닌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인왕산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바로 ‘선바위’ 때문이다.
높이 7미터, 가로 10미터 정도가 되는 큰 바위로 기묘한 모습으로 산 중턱에 불쑥 솟아 있다. 인왕산에서 가장 유명한 바위이자 서울시 민속자료(제4호)이기도 하다. 2개의 거대한 바위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선(참선 禪)자를 붙여 선바위라 불렀다.
추운 날씨에도 찾아와 소원을 빌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 놀랐다. 고목, 거석 등 자연물을 경외하고 숭배하는 토테미즘(Totemism)이라는 원시적 종교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로 한양 천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조선왕조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선바위 앞에서 1,000일 기도를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면서 이름난 기도처가 되었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불교를 상징하는 선바위를 성 안으로 할 것을 주장했으나, 유학자인 정도전이 반대하면서 격렬히 대립하다 결국 한양도성 바깥에 남겨두게 된다.
선바위 아래 자리하고 있는 국사당(國師堂, 종로구 통일로18가길 20 (무악동))은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다. 조선시대 나라에서 제례나 기우제 등을 지냈던 신당이다. 원래는 남산(당시엔 목멱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는데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국사당이 이곳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신당 안에는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무신도(巫神圖)가 걸려 있다. 단군에서 칠성신(七星神 ), 산신령, 최영 장군까지 다채로운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유교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무신(巫神)과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에서 제사를 드렸다니··· 민족의 유전자 속에 깊이 박혀있는 오래된 신앙의 끈질긴 저력을 보는 것 같았다.
국가민속문화재17-17호인 <인왕산 국사당 최영장군 무신도>를 보면서 왜 최영장군이 무속의 신이 됐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이성계와 함께 고려 말기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며 이름을 떨쳤던 장수였다. 최영 장군이 무속에서 절대 영험을 갖게 된 결정적 이유는 고려왕조의 수호신이자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 청백리이며, 백성들을 구원한 명장의 극적이고 억울한 죽음에 기인한다.
최영은 위화도 회군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측근이자 후배 무장 이성계에 저항하다 체포된 후 73세의 나이에 처형당하고 만다. 백성들은 그의 넋을 추모했고 그들 자신도 최영의 혼령에게 위로받기를 원했다.
국사당에서 하산길로 택한 인왕사 주변엔 작은 절집들이 많다. 좋은 산엔 좋은 절이 많다는 말은 인왕산에도 해당되지 싶다. '기도 방 있습니다'라고 쪽지를 붙여놓은 작은 절집들이 모여 있는 주택가 벽면마다 온통 불화(佛畵)가 그려져 있어 눈길이 머물렀다. 다채로운 불화를 감상하며, 어느 절에서 들려오는 은은하면서도 여운이 깊게 남는 종소리를 들으며 내려오다 보면 3호선 전철 독립문역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