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과거의 너를 따뜻하게 안아볼래
사실 나는 그래. 갑자기 심통이 나기도 하고,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기도 해.
자기 전, 그러니까 스탠드 불을 끄고 보드라운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후 눈을 감았을 때, 갑자기 그런 모습이 스쳐지나갈 때가 있거든. 나 아닌 누군가와 사랑을 속삭이는 너의 모습.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스무살 특유의 햇살같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누군가의 손을 잡는 너. 추운 겨울, 따뜻한 커피를 주머니에 넣고 조심히 걸어와 그사람의 손에 살포시 쥐어주는 너. 스탠드에 앉아있는 그사람을 바라보면서 누구보다 멋지게 풋볼 경기를 펼치는 너. 아픈 그사람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며 설레는 너.
토라진 그사람을 풀어주기 위해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 편지를 쓰고, 헤어진 후엔 몇날며칠 밥도 굶으며 끙끙 앓았을 모습. 계절이 바뀌고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사람이 근처에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을 모습. 가끔은 소식을 전해들으면서 마음이 아렸을 모습. 네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과거의 너. 열심히 사랑하고 아프게 이별했던 예전의 너.
'나도 누구 못지않게 연애했으니까 억울할 것도 없어. 이해할 수 있어'라며 큰소리 치는 나지만, 가끔은 이상한 사람처럼 혼자 상상하고 혼자 심통을 내.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에 마냥 훈훈하게 미소지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래도 나는 노력하려고 해. 너의 과거까지 사랑하도록 말야.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는 내게 '내 과거에 대해선 절대 물어보지 마!'라면서 철벽방어를 하던 남자가 있었거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넌 내 삶에서 이 소중한 영역에 절대 들어올 수 없어'며 철저히 선을 긋는 그사람에겐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어. 그보다는 '궁금하다면 말해줄 수 있어. 그런데 내겐 네가 지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야'란 도닥임이 훨씬 따뜻했지.
게다가 나는 너의 과거가 지금의 너를 만들고, 결국 '우리'를 만나게 해준 것이라고 생각하거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지는 건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잖아. 그 날 그 시간에, 여러 요소들이 완벽하게 조합을 이뤄서, 두 사람이 그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어느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가령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거나 널 소개해준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지 않았거나 네가 대학원 동창회에 나가 내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그렇게 생각해보면 너의 과거가 지금의 너를 만들었기에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나는 과거의 아픈 사랑을 지나치며 대화가 통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이성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버릴 수 있게 됐어. 그 때 네가 영화처럼 나를 찾아왔지. 내 과거가 없었다면 나는 너를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나는 사랑에 행복해하고 괴로워한 과거의 너를 따뜻하게 안아볼래. 갑자기 심통이 나고 마음이 아파도 이해해볼래. 너를 지금의 너로 만들어준 사람들에게도 고마워할래. 언젠가 마주할 일이 있다면, 나의 사람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주어서 고맙다고 미소지어볼래. 때론 질투에 투닥거리더라도 너의 지난날을 사랑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