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서로의 손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고. 박민규의 소설에 나온 문장인데 내 마음에 깊이 담긴 말이다. 내가 S와 G 부부를 보면 떠올리는 말이기도 했다. S와 G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소개한 바가 있다. ('깊은 물속은 아무도 모른다')
모든 이름을 알파벳 한 글자로 가려버린 탓에, 읽는 입장에선 누구 이야기인지 모호할 테니 다시 처음부터 차곡차곡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다.
시력을 잃고 마비되어 가는 몸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 남편 S. 그리고 마찬가지로 건강이 좋지 않지만 S를 위해 더 힘을 내는 그 아내 G. 두 사람의 인생은 드라마틱하다. 문제가 있다면 그 드라마의 장르에 비극적 요소가 많이 끼어 있다는 점이지만.
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G는 아직 중등 교육도 채 다 못 마친 나이였다. 대략 십대 후반이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 당시를 떠올리는 S의 입가에는 항상 은은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S의 말을 나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목소리나 말투만으로도 미온수처럼 담담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여성의 인권이 패대기 쳐지는 일이 밥 먹듯 일어나는 나라에서, 결혼한 아내가 중등 교육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남편이란 어떤 존재일까. S의 직업은 운전수였고, 자기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이니 상당히 유복한 가정이었다.
두 사람이 꿈꿨을 장밋빛 미래를 깨뜨린 비극은 교통사고에서 시작되었다. 제대로 된 병원인 아니라 ‘야매’ 의료 센터로 이송된 S는 아마 거기서 수혈을 잘못 받았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시간이 지나면서 몸 여기저기가 이상하다는, 그런데 도통 좋아지질 않는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서서히 깨달았다. 그때부터 이 곳 저 곳 여러 병원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여러 가지 검사를 제안했다.
인도는 세계 제2의 HIV/AIDS 창궐 지역이다. 그 의사들이 S가 HIV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을 눈꼽만큼도 짐작하지 못해서 그 숱한 검사를 다 거치게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필요한 검사를 다 받아보게 하니까 검사에 어느 정도 많은 시간과 돈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유복하던 집의 기둥뿌리를 들어먹을 만큼 많은 검사를 거치며 보낸 긴긴 입원 기간 동안 대체 어떻게 HIV 감염 사실을 놓쳤을까 하는 의문은 불쾌하게 남는다.
그러기를 수 년, 결국 마침내 한 병원에서 HIV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뾰족한 치료의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병명을 알아봤자였다. 의사나 사기꾼들이 이끄는 대로 다양한 민간요법부터 복잡한 검사까지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S는 시간도 돈도 시력도 잃었다. 그러다 마침내 ART(항레트로바이러스제) 요법을 시작했다. 그게 어느덧 11년 전의 일이다.
ART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ART, 항레트로바이러스제는 HIV 감염인들이 AIDS로 진행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는, 그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는 (현재 보편 상용화된 중에는) 유일한 약이다. 가끔 누군가가 ‘이제 더 이상 에이즈는 죽을 병이 아니므로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관리만 잘 하면 되는 병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 약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고된 노동 현장에 꼬박꼬박 가지 않더라도 건강한 식단으로 밥 먹고 살면서 비싼 약 값을 치를 수 있는 사람, 주변에 믿을 만한 의사가 정확하게 진단을 내려주는 삶이 평생 지속될 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매우 많은 건 둘째치고 ART 자체가 온전한 해결책이라고 볼 수도 없다. ART는 진행을 막아줄 뿐 HIV를 신체에서 완전히 뽑아낼 방법은 적어도 보편적 상용화 선에서는 아직 요원한 데다가, ART라는 약 자체도 굉장히 무서운 약이다.
인도의 경우 공립 병원에 등록이 되어 있으면 무료로 나누어 준다. 그나마 비싼 약값 걱정을 좀 덜지만, 그것도 일부 라인만 해당되며 그나마도 받아야 할 약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실제로 우리 환자들에게 심심찮게 들은 이야기였다. 무료로 나눠 줄 약을 중간에 어떤 분께서 꿀꺽 해 드시고서 어디 비싼 값에 팔아 먹기라도 했을까.
ART를 무사히 조달받는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빼먹지 않고 시간까지 정확하게 맞춰 챙겨먹지 않으면 내성이 생겨 더 이상 그 약을 쓸 수 없는 것은 물론, 부작용도 상당히 크다. 부작용이 어찌나 큰지 ART의 사용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설령 관리를 잘 한다 해도 영원히 쓸 수 있는 약은 아니다. 어느 정도 쓰다 보면 내성이 생겨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라인이 4가지밖에 되지 않아 그 4가지 라인의 조합이 끝나면 더 이상 쓸 수 있는 약이 없다. HIV 양성 진단을 초기에 받고 약을 무사히 조달 받는 삶을 산다 해도 “관리만 잘 하면 되는 병” 운운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손쉬운 일은 아니라는 소리다.
게다가 S는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부부 모두 양성이라는 뒤늦은 발견, 의사들이 이리저리 뺑뺑이 돌리는 동안 차곡차곡 이루어진 진행… S는 그러는 동안 시력을 잃었다. 왼쪽 몸과 하반신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힘도 잃었다. S의 다리를 누군가 아주 세게 꼬집을 때 ‘아, 누가 내 다리를 만지고 있구나’ 정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집에 손님이 올 때마다 S는 얼마 안 되는 세간 중에서도 소중하게 머리맡에 놓아둔 사진 액자를 꺼내 보여 준다. 결혼 초반에 찍은,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 보던 그 시절 사진 속의 S와 지금의 S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움푹 파인 눈, 탁한 회색으로 덮인 눈동자, 바짝 마르고 기운이 없는 한 남자의 모습은 언제나 죽음과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도 S를 처음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해리포터의 디멘터 같은 모습이라고.
그나마 그런 S를 보았을 때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있는 건 아내 G의 정성 어린 손길 덕분이다. 언제 가도 항상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에서 깨끗하고 단정한 셔츠를 입고 앉아 있다. 집안은 선선한 공기가 감돌고 퀘퀘한 냄새 따위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내 G도 건강한 몸은 아니다. G도 여태까지 HIV와 ART의 부작용으로 고생을 했다. 다리에 문제가 생겨 걷지 못했던 때도 있었고, 갑자기 언어 능력에 문제가 생겼던 때도 있었으며, 암이 의심되어 조직을 떼어내 검사를 하고 돌아와 결과를 기다리며 조마조마했던 때도 있었다.
몸만 힘든 게 아니었다. G가 허드렛일이나마 할 수 있었던 병원이 장소를 옮기면서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G는 집세가 싼 곳으로 집을 옮기고, 남편을 두고 멀리 갈 수없어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고, 쌀 떨어지는 일은 밥 먹듯 돌아오고… 하는 생활을 계속해 왔다.
그래도 그렇게 허덕이는 심정으로나마, 한 고비씩 한 고비씩 힘겹게 넘어 여기까지 살아 왔다. 현지인 스태프가 G는 절대 울지 않는다고, 스스로 그렇게 다짐하며 산다고 귀띔해 주었다. 자신이 울고 무너지면 같이 무너질 남편을 돌볼 사람이 없기에 더욱더 힘을 내는 것이라고 했다.
속으로는 뜨거운 눈물을 얼마나 흘렸을까. 그리고 그 마음은, 힘든 와중에도 어떻게든 방송 통신 교육과정으로 아내가 하고 싶어 했던 공부를 더 시켜 주고 싶어 했을 만큼 아내를 애틋하게 아끼는 S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꿈은 작년까지도 아등바등 애쓰던 것이었으나, 결국 좌절되었다.)
그래서 우리 팀에게 모든 환자들이 다 그렇듯 G와 S도 ‘특별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각자를 모두 그 사람만의 특별함으로 사랑하지만, G와 S는 G와 S 그대로 항상 마음 쓰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여태까지 항상 그런 고비가 있을 때마다 함께 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으려 애를 써 왔다.
집에 있는 쌀도 퍼다 주고, 가서 이야기 듣고 앉아 같이 침통해하고, 위로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위로하고, 단기 봉사팀이 오면 데리고 가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어떤 큰 교회 장로님이라는 분이 우리 하는 일을 알고 다달이 후원하고 싶다고 했을 때 곧 바로 연결해 준 사람도 이 둘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갔을 때, 웃음기조차 사라진 G의 얼굴을 보며 또 그 G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우리는 마치 그 집안 공기가 우리를 찍어 누르는 듯한 중압감에 괴로워했다. 항상 눈을 마주치고 예쁜 눈웃음을 지어 보이던 G는 고개도 채 들지 않은 채 가까스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하는 이야기들은 하나하나 가슴에 턱턱 무겁게 얹혔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더니. 태풍의 여파로 바람이 많이 불어 S의 어머니 집이 무너지고 어머니도 다치셨다, 집 주인이 집을 팔려고 하는데 이 집을 사는 사람이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제 ART의 라인을 바꿔야만 하는데 라인을 바꾸면 부작용으로 기억의 상실이 올 수 있다고 했다.
기억의 상실. 그건 정말 너무 아픈 말이었다. 현재도 미래도 상실해 버린 이들의 과거까지 상실해 버릴 수 있다는 말은, 서로에게 남은 서로마저 잊힐 수 있다는 말은 그 가능성만으로도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 설령 그 가능성이 실낱 같다고 해도, 웬만하면 안 그럴 거라고 해도 그냥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팠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미어지는데 그 삶을 고스란히 살아내고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얼마나 괴로운 일일지, 내가 감히 괴롭다 아프다 하는 단어들로 표현이나 할 수 있는 일인지, 상상할 수 없는 그 무게 앞에서 우리는 순식간에 개미처럼 작은 존재들이었다.
공기로 전해지는 것이 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공기로 전해지는 감정이, 서로 느낄 수 있는 흐름이 분명 있다. 그 날은 그게 더욱 선명했다. 때문에 드문드문 우리에게 통역을 해 주던 현지인 간사도 졸린 것처럼 눈이 감기네, 하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우리 모두 그게 졸리고 피곤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른한 오후의 공기와는 무게가 다른 그 중압감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싶었지만 결국 우리는 또 다시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들이 말할 때에 말없이 듣고, 그들이 듣고자 할 때에 소망을 말하는 것밖에 할 수 없으니.
이 깊은 절망 가운데서, 한 걸음 나아가기도 벅차고 뼈마디가 아픈 이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바라본다. 상황이 변할 거라는 미신적 기대나 현실 외면이 아니라- 이 끔찍한 현실에 발을 두고서도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 소망의 이름은 사랑임을 우리는 다시 생각한다. 서로를 버티게 해 준 서로, 그 서로의 힘. 그들에게서 나로, 또 나에게서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로 전해지는 ‘버틸 힘’.
HIV라는 불청객이 삶에 불쑥 발을 들인 이후로 단언컨대 단 하루도 쉬운 적 없었던 그들의 삶에서도, 하루 끝에 심란함만 남아 눈물 바람 짓는다 해도, 절망이 너무 깊어서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고 그렇다는 게 누구에게나 납득될 만큼 괴로운 가운데서도, 우리는 더듬더듬 손을 내밀어 버틸 힘을 찾는다.
절망으로 가득 차 소망이라곤 보이지 않기에 소망을 붙든다. 버틸 재간이 없어서 버틸 힘을 붙든다. 역설적이지만 그랬다. 그래서 우린 서로의 손을 놓을 수 없고, 그래서 서로를 포기할 수 없는 거였다.
G와 S의 이야기를 쓰는 건 바로 그 힘이 우리임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조금 더 잘 살 수 있도록 서로의 손을 놓아 버리고 달려나가는 것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이기심이 아니라 사실 이기적이지 못한 선택임을, 그럼에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사방에서 옭아매는 듯한 삶을 살면서도 기억하기 위함이다. 서로를 붙드는 것은 서로이고, 우리는 그것으로 산다. 우리는 끈덕진 사랑으로 산다.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여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저 먼 풍경을 바라봐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 길
기억해 혹시 우리 손 놓쳐도 절대 당황하고 헤매지 마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 곳은 넓지 않아서
우린 결국엔 만나
크게 소리 쳐 사랑해요 저 끝까지
(정인/윤종신-오르막길)
G와 S를 보고 돌아오는 길, 어쩌면 더 이상 이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출국까지는 대략 2달이 약간 덜 되는 시간이 남아 있고 그 안에 이들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모든 건 그냥 열려 있는 가능성일 뿐이지만, 그 가능성 때문에 작별 인사는 여느 때보다 힘이 들었다.
눈을 마주치고 할 수 있는 한 활짝 웃어 보이며, 언어의 차이를 뛰어넘어 전해지는 긴긴 말을 마음으로 나누고 G를 꼭 끌어안고 인사를 하는 내내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이 땅에 오래오래 존재해 주길, 간절히 바랐다.
밤. 푹 가라앉은 마음에 물을 주는 심정으로 모국어로 된 노래를 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S와 G를 생각했다. 오르막길 넘으면 내리막길이 나온다고 누가 그랬을까... 오르막길 지났는데 또 오르막길이 나오는 것 같은 구간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러나 굳이 고된 나를 택한,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아름다울 것이다. 아름답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결코 아니지만, 힘들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다. 버팀목, 이니까. 우리는 그런 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