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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Jul 15. 2022

나는 언제나 지금이니까

무라카미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이 소설을 책으로 만든다는 말을 들었을 때, 표지 디자인은 내가 맡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만일 책으로 나온다면 리리의 얼굴로 표지를 장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기억해? 카페 '나이아가라'에서 처음 만났을 때 찍은 거잖아. 그때 우리는 압생트를 몇 잔이나 마실 수 있는지 시합을 했잖아? 내가 세 잔째를 마시다가 가게에 있던 네덜란드 히피에게서 라이카를 빌려 찍은 거야. 리리는 이 사진을 찍은 다음에 아홉 잔을 마시고 쓰러져버렸으니까 기억 못할지도 몰라.
리리, 지금 어디야? 4년 전이었던가, 한번 하우스에 가 보았지만 네가 없더라. 혹시 이 책을 사면 연락해줘.
루이지애나로 돌아간 어거스트에게서 한 번 편지가 왔었어. 택시 운전을 한다고 해. 리리에게 안부 전해 달라고 말이야. 혹시 리리는 그 튀기 화가랑 결혼했을지도 모르겠네. 결혼했어도 괜찮으니까 가능하다면 한 번만 만나고 싶어. 둘이서 다시 한 번 <케세라 세라>를 노래하고 싶어.
이런 소설을 썼으니까 내가 변했을 거라는 생각은 말아줘. 나는 그때하고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처음 읽고 무척 불쾌해져서 책장에 처박아뒀다가 서른쯤엔가 다시 읽고 류가 좋아졌는데 어제 오늘 세 번째로 읽는다. 특별히 세 번 읽을만큼 좋다기보다 어떤 책들은 몇 번인가 읽어도 싫증이 잘 안난다. 읽고 다시 읽기까지의 기간이 길어서 전혀 다른 책같은 기분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마약 집단섹스 구토 자해 환각, 역시 아침에 읽기엔 적절치 않아 혀를 차면서도 읽기를 멈추지 못하다가 갑자기 맨 뒷장이 궁금해져 펼쳐보니 이런 후기가 있다. 기억이 안 나. 이런 후기가 있었나. '이런 소설을 썼으니까 내가 변했을 거라는 생각은 말아줘. 나는 그때하고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니까.'라는 말, 이 말 왜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답지? 가능하면 한 번만 만나고 싶어, 둘이서 케세라세라를 부르고 싶어, 나는 그때하고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우리 가슴 속에 빛나는, 시들 줄 모르는, 영원한 청춘이라든가 젊음. 그리고,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라고 말하던 그 시절 무라카미 류의 올곧은 마음 때문에 몇 대의 열차를 보낸 채 승강장에 앉아 있다.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아서 계속 앉아 있는데 열차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내가 있는 의자까지 잠시지만 닿는다. 그리고 곧 사라져. 잠시지만 닿아, 그리고 사라져.


‘우리’라는 것도 그런 걸까. 분명 닿아. 그렇지만 언젠가는 사라져. ‘닿아’에 의미를 둘지 ‘사라져’에 의미를 둘지 어느 쪽인지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질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될 수 있으면 ‘닿아’에 무게를 두는 사람이고 싶다. 사라진다 해도 닿았던 기쁨을 얕보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무라카미 류가 언젠가 닿았던 리리와의 시간들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 것처럼, 그때와 같으니 한 번만 더 만나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쉽게 지배하는 ‘부질없다는 무력감 지고 싶지 않다. 우리 분명 닿았잖아, 그래서 언젠가를 지나올  있었잖아, 그러니 지금 사라져 보이지 않는 데도 부질없다고 생각할  없다. 이어지지 않아도 사라진대도 지난 시간이 소중해야 지금도 의미있다. 어차피 지나면 의미없어 라는 마음으론 지금을 얕잡아 보게  테니까. 지금을 강하게 사랑할  없으니까. 사라진 우리를 귀하게 여기며 나는 지금 강해진다. 언제나 나는 지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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