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이 소설을 책으로 만든다는 말을 들었을 때, 표지 디자인은 내가 맡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만일 책으로 나온다면 리리의 얼굴로 표지를 장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기억해? 카페 '나이아가라'에서 처음 만났을 때 찍은 거잖아. 그때 우리는 압생트를 몇 잔이나 마실 수 있는지 시합을 했잖아? 내가 세 잔째를 마시다가 가게에 있던 네덜란드 히피에게서 라이카를 빌려 찍은 거야. 리리는 이 사진을 찍은 다음에 아홉 잔을 마시고 쓰러져버렸으니까 기억 못할지도 몰라.
리리, 지금 어디야? 4년 전이었던가, 한번 하우스에 가 보았지만 네가 없더라. 혹시 이 책을 사면 연락해줘.
루이지애나로 돌아간 어거스트에게서 한 번 편지가 왔었어. 택시 운전을 한다고 해. 리리에게 안부 전해 달라고 말이야. 혹시 리리는 그 튀기 화가랑 결혼했을지도 모르겠네. 결혼했어도 괜찮으니까 가능하다면 한 번만 만나고 싶어. 둘이서 다시 한 번 <케세라 세라>를 노래하고 싶어.
이런 소설을 썼으니까 내가 변했을 거라는 생각은 말아줘. 나는 그때하고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처음 읽고 무척 불쾌해져서 책장에 처박아뒀다가 서른쯤엔가 다시 읽고 류가 좋아졌는데 어제 오늘 세 번째로 읽는다. 특별히 세 번 읽을만큼 좋다기보다 어떤 책들은 몇 번인가 읽어도 싫증이 잘 안난다. 읽고 다시 읽기까지의 기간이 길어서 전혀 다른 책같은 기분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마약 집단섹스 구토 자해 환각, 역시 아침에 읽기엔 적절치 않아 혀를 차면서도 읽기를 멈추지 못하다가 갑자기 맨 뒷장이 궁금해져 펼쳐보니 이런 후기가 있다. 기억이 안 나. 이런 후기가 있었나. '이런 소설을 썼으니까 내가 변했을 거라는 생각은 말아줘. 나는 그때하고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니까.'라는 말, 이 말 왜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답지? 가능하면 한 번만 만나고 싶어, 둘이서 케세라세라를 부르고 싶어, 나는 그때하고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우리 가슴 속에 빛나는, 시들 줄 모르는, 영원한 청춘이라든가 젊음. 그리고,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라고 말하던 그 시절 무라카미 류의 올곧은 마음 때문에 몇 대의 열차를 보낸 채 승강장에 앉아 있다.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아서 계속 앉아 있는데 열차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내가 있는 의자까지 잠시지만 닿는다. 그리고 곧 사라져. 잠시지만 닿아, 그리고 사라져.
‘우리’라는 것도 그런 걸까. 분명 닿아. 그렇지만 언젠가는 사라져. ‘닿아’에 의미를 둘지 ‘사라져’에 의미를 둘지 어느 쪽인지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질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될 수 있으면 ‘닿아’에 무게를 두는 사람이고 싶다. 사라진다 해도 닿았던 기쁨을 얕보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무라카미 류가 언젠가 닿았던 리리와의 시간들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 것처럼, 그때와 같으니 한 번만 더 만나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쉽게 지배하는 ‘부질없다는 무력감’에 지고 싶지 않다. 우리 분명 닿았잖아, 그래서 언젠가를 지나올 수 있었잖아, 그러니 지금 사라져 보이지 않는 데도 부질없다고 생각할 수 없다. 이어지지 않아도 사라진대도 지난 시간이 소중해야 지금도 의미있다. 어차피 지나면 의미없어 라는 마음으론 지금을 얕잡아 보게 될 테니까. 지금을 강하게 사랑할 수 없으니까. 사라진 우리를 귀하게 여기며 나는 지금 강해진다. 언제나 나는 지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