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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그 Mar 22. 2022

PMS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

[오늘 왜 울었나요?] #5. PMS는 못 참지

이상한 날이었다.

새벽부터 내리 비가 오고 있었고 바람이 불었다. 산수유도 이미 피어버린 3월 중순인데, 이렇게 춥다니. 곱슬거리는 앞머리를 애써 빗어가며 독서모임 장소로 향했다. 4시간도 자지 못한 채 독서모임에 참여했지만 어느 때보다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독서모임 사람들이 좋아서, 거리 조절에 어느 때보다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저는 느슨한 연결이라는 말이 싫어요, 인간관계 난로 비유도 싫구요.'라는 말을 뱉었다.

모임이 끝나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 눈을 붙이려 했지만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꽃시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망고 튤립 한 단을 사들고도 부족한 느낌이라, 도서관에 들려 <꿈의 해석>이라는 800쪽짜리 책을 빌렸다.

집으로 돌아오니 3시였다. 늦은 첫 끼니를 챙기고 영어공부를 30분 했다.

그제야 조금 잘 마음이 들어 침대에 누웠다. 갑자기 누군가 하루 만에, 아니 한 시간 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 내게 '멀어지고 싶다'고 이야기하던 게 떠올랐다. 그때 너무 힘들었지, 정말 너무 어려웠어. 생각하다가 그럴 만큼 그 사람도 힘들었겠지 생각했다. 다른 이에게는 이렇게 쉬운 한 마디가 나에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나는 자꾸 나를 단두대에 세운다. 누군가 그립고 보고 싶을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하지만 그만, 너도 많이 괴로웠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토닥일 줄도 이제는 조금 안다.

꿈에서는 할머니와 엄마랑 동생을 만났다. 할머니는 또다시 내게 산 사람이었다. 기력도 든든하셔서 오랜만에 집에 내려간 나에게 침을 놓아주셨다. 눈 아래 큰 침이 박힌 나는 박제된 동물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우는 소리로 엄마를 불러 칭얼거리며 침을 빼 달라고 했다. 동생과 엄마는 또 다른 방에서 음악 프로를 보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야 할 만큼 정말 다른 방이었는데, 그 밝은 복도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다급했는지 모른다.




꿈에서 깨서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먼저 엄마가 보고 싶었고. 갑자기 할머니 생각을 하자 눈물이 터졌다. 우리에게 너무 조심하라고 해서, 다섯 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집을 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늦었는데 어디 가냐'고 해서 우리를 모두 화나게 만들었던 할머니. 우리는 할머니가 왜 그러는지 알면서도 견딜 수 없어 짜증을 내곤 했다. 얼마 전 클라우드를 정리하다 할머니 영상을 보았다. 내가 차린 어버이날 밥상에서 할머니는 웃고 계셨다. 요양원에서 코로나 시기를 보내신 할머니 몇 년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득해진다. 많이 외로우셨을까. 아빠가 아침, 저녁으로 챙겨주셨으니까 괜찮았을까.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다. 그 후로 1년을 넘게 찾아뵙지 못하고 결국 할머니를 떠나보낸 건 좋지 않지만.




나는 우주에서 작은 존재이지만, 지금의 이 상실감과 아픔은 어디라도 가닿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선명하다.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상실이 너무 많은 이 세상을. 상실은 가짐, 만남을 전제로 하니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면 좀 나아질까. 자연의 일부로서 스러지는 다른 자연물들의 생애주기를 보면서 연습하고 의연해질 수 있을까.

침대에서 그런 생각을 하며 엉엉 울었다. 긴 울음은 아니었다. 휴대폰에 느낀 감정을 기록했다. 그리고는 '이제 그만, 됐다!'하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서 나는 생리가 시작된 걸 알게 되었다. 마음에 남아있던 슬픔의 부스러기들이 단번에 녹아 없어졌다. 방금 전까지 영원히 슬플 것처럼 울었는데 그 원인이 호르몬 때문이었다는 걸 알고 나니 우스워진 것이다. 그래 PMS 때 우울한 건 또 못 참지.




얼마 전 작은 사고가 있어 어깨 부근을 부딪힌 적이 있다. 날개뼈 주위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통증이 있어 한의원에 달려갔다. 한의사 선생님께서는 채찍 이야기를 해주셨다. 몸의 한 곳에 큰 충격이 가해지면, 그 충격은 아주 짧은 시간 온몸에 진동처럼 퍼진다고. 어깨를 부딪혀도 무릎이 아픈 사람이 있고, 목이 아픈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게 나에게는 날개뼈라며, 평소에도 불편한 게 있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쭈그려 앉아 오른손으로 샤워기를 들고 머리를 감을 때 불편감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날개뼈 부근에 침을 놓고, 물리치료를 하고 찜질을 했다. 바늘을 무서워하는 나지만, 선생님께 침 많이 많이 놓아달라고 말할 뻔했다.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통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씻은 듯이 통증이 사라졌다. 오히려 사고를 당하기 전에 옅게 느끼던 불편감까지 모두 사라졌다.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호르몬 때문이든, 어떤 일 때문이든 마음에 충격이 가해지면, 마음 가장 여린 부근에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매번 호르몬을 탓하거나 얼른 기분 전환하기 바빴는데, 어쩌면 꺼내 볼 수도 없고, 측정하기도 어려운 마음의 여린 곳을 인지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시절 심리학을 공부할 때, 트라우마에 대해 배우며 나는 트라우마가 무서운 이유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실체가 없기에 끔찍하고 더 난폭하게 변형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일어나지도 않았던 사건으로 평생 고통받을 수도 있고, 너무 많은 왜곡을 거쳐 느끼지 않아도 될 감정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건들을 기록한다. 마주 보기 어렵지만, 그것을 겪은 지금이 그 일이 가진 힘이 가장 약한 때임을 알기 때문이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원형을 기록해놓는 것이다. 그걸 꺼내보는 것만으로도 사건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앞으로도 나는 수많은 PMS를 겪을 것이다. 끝은 있겠지만, 한 달에 한 번은 조금 가혹한 빈도이긴 하다. 매번 '오늘 참 요상하네' 생각하다 슬픈 꿈을 꾸고 잔뜩 울지도 모르지만 그때마다 일기를 쓸 거다. 슬픔을 피할 방도는 없지만, 그럼에도 나를 잘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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