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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이또이 Nov 27. 2021

만추(晩秋)


요즘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주 5일제로 금요일부터 주말이 시작된다지만 우리집은 그렇지 않다. 남편은 격주로 쉬고 있고 쉬는 토요일이라 해도 별일 없으면 특근으로 나가서 일을 한다. 오늘은 일하는 토요일이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며 학원이며 바쁜 시간을 보내는 아들은 금요일 늦게 잠이 들어 토요일 아침 늦게까지 늦잠을 자곤한다. 꼬맹이도 오빠와 같은 패턴으로 토요일 만큼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다. 아이들이 그러는 사이에 아빠는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했다.


남편의 출근 후 미지근한 물 한잔을 떠서 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어제 늦게까지 했지만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드로잉 과제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드로잉 과제는 '같은 관점의 세가지 다른 드로잉'을 제출하는 것인데... 이번 드로잉 대상은 낙엽으로 결정했다. 낙엽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기도 여러 날이었다. 지금 지천에 깔린 게 낙엽인데 내가 바라보는 대상은 수많은 낙엽이 아니라 '하나의 낙엽'이다.


주워온 낙엽이 있었던 공간을 생각하기도 하고 낙엽의 색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한 색에서 다른 색으로 은근히 변하는 단풍색이 물감으로 그라데이션을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고아하게 느껴졌다. 잎맥을 만져봤다. 가장 중심에 있는 주맥과 주맥으로 부터 가지를 쳐 나온 측맥이 있는데 이들은 물과 양분이 지나가는 수로 역할을 한다. 인체를 살펴 보면 혈관이 지나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촘촘하고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역할을 하는 측맥은 아주 미세한 망을 형성하고 있다. 측맥의 가느다란 선들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만추가경(晩秋佳景)은 그 밖에 것들에 불과했다. 몰입은 배경에 비추는 조명을 줄여 오직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핀라이트를 켜는 것과 같다.


만추, 29.7x42cm, 2021, 연필




아침을 간단히 먹고 아이들은 주말이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나는 그 시간을 이용해 잎맥에 측맥 부분을 마무리해 보기로 한다. 선의 굵고 얇음, 촘촘하고 느슨함, 뭉치고 풀어지는 특징을 잡아 가시적으로 지루하지 않도록 관찰을 토대로 잎맥을 채워나갔다. 아이들 영화가 끝나는 시간과 딱 맞아 떨어지게 작업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눈이 튀어나올 지경에 이르자 못견디게 밖으로 뛰쳐 나가고 싶었다. 따스하게 옷을 입혀 물통 하나 달랑 들고 근처 놀이터나 다녀올 생각으로 가붓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산책로가 가까워지면서 눈이 내리듯 바닥에 사뿐히 내려 앉는 낙엽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조금 바람이 불었을 뿐인데 온 몸을 팽이처럼 돌려가며 멋스럽게 낙하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작은 바람에도 몸을 실어 멀리까지 미끄러지듯 날아가 안착하는 것들도 있었다. 벚꽃이 질 때 흰 눈이 내리듯 낙하하는 꽃잎을 보는 것처럼 같은 장면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수많은 잎에 잎맥 그리고 더 디테일한 측맥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만추의 절정을 온몸으로 맞을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 두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사물에 집중하게 했던 핀라이트는 꺼지고 온 사방을 비추는 조명이 켜진 것이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사람들은 그 감상을 사진으로 많이 기록하고 있었다. 산이며 들이며 호수며 우리가 지나가는 길 모퉁이에서 가을 단풍을 찍어 공유하는 이들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난 아이들 키득거리며 신나게 놀고 있는 놀이터 중간 즈음에 놓인 둥그런 의자에 벌러덩 누워 코 끝으로 느껴지는 가을 바람이며 바스락 거리는 낙엽 굴러가는 소리며 감은 눈을 콕콕 찌르며 들어오려는 날카로운 가을 햇볕을 좀 즐겼다. 엄마가 이런 감상에 젖을 수 있도록 꼬맹이와 신나게 놀아주는 첫째에게 고마웠다. 이들의 놀이가 시들해질 무렵 우린 배가 고팠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뭇잎을 한 봉지 가득 채워 징검다리에 앉아서 나뭇잎을 물살 좋은 곳에 띄우고는 힘차게 앞으로 흘러가는 나뭇잎배를 응원했다.


사람들이 SNS에 공유한 많은 사진 중에 남편과 신혼 때 갔었던 주왕산 입구에 있는 주산지 단풍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아웃포커싱으로 가까운 것만 멋지게 도드라져 보이는 그런 사진 말고. 가을의 전체 풍경이 꽉 찬 그래서 하나하나가 모두 영롱하게 빛나는 그런 사진이 유독 좋았다. 예전 추억의 일부를 가져와 오늘 가을 풍경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듯 그렇게 꽉 찬 만추의 정경을 완성해 본다.

그래서 느낀다. 부분은 전체로 이어지고 또 전체는 부분의 역할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잎맥을 통해 본 분열은 전체에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연결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상처라고 생각했다. 세월의 흔적은 상처로 남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상처마저도 지금의 생을 유지하는 한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모로 느끼는 것 같다.


저물어 가는 가을. 가을의 끝. 만추.




만추, 29.7x42cm, 2021, 콩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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